본문내용
이보다 더 신기한 것은 이런 일이 지식에도 생긴다는 점이다. 어떤 지식은 우리들 속에서 사라지고 또 다른 지식이 생겨나 지식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동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지식 하나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학습이니 연습이니 하는 것도 지식이란 것이 소실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지식이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며, 학습이란 소실되는 것 대신에 새로운 지식을 집어넣어 우리의 지식이 그전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다 보존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적인 것처럼 언제나 그냥 그대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늙어서 사라져 버리는 자가 과거의 자기와 같은 어떤 새로운 것을 뒤에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이 불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만물이 본성상 자기 자신의 소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멸이야 말로 이 모든 열심과 사랑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멸의 공훈과 영광스러운 명성 때문에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며, 우수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하지만 심령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육체보다도 오히려 심령면에서 더 잉태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심령면에서의 잉태란, 예지와 온갖 덕을 의미한다.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 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 우리가 절제 또는 정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을 가까이하여 함께 지내면 그는 오랫동안 잉태해 왔던 것을 출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자식들이 있는 경우보다도 훨씬 더 밀접하며 사귀며 더 굳은 우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신비 중에 보다 높은 계시에 도달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마음이 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설사 그 용모가 그다지 환하지 못할지라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을 터득하여야 한다.
이 아름다움이란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첫 째로 그것은 영원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데서는 아름답고, 또 어떤 데서는 추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독립자존하면서 영원히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방법은 누구든지 올바른 소년애를 통해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다른 아름다움으로 올라가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는 마침내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 자체만을 아는 것이 완전한 학문으로 나아가 드디어 미의 완성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원하는 것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에로스만큼 인간의 본성을 더 잘 도와주는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에로스를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이 끝나자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이후 내용은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취해서 와서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하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에 대한 찬미를 한다. 내용은 사실 거의 흠모하는 내용에 가깝다.
『향연』은 플라톤의 저서로서 삶의 방식을 탐구함에 있어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에 가 닿으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사랑이라 규정한다. 그 사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을 통해 얻어진 진리를 구체적 행위의 차원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노력의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육체의 균형미를 찬미하고, 성을 인간의 생식과 출산으로 가능해지는 아름다운 선의 전승이란 차원에서 바라보고, 원래는 하나였다가 둘로 나뉜 인간이 그 진정한 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되는 것이 동성애이며, 이 모든 것이 절대 선 그리고 진리와 지혜의 깨달음에 닿으려는 인간 혹은 철학자의 진정한 사랑함의 도정에 있어 불가분의 것임을 역설한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되는 향연 문화와 제자들에 의해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의 대상으로 추앙되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서술하면서 플라톤 자신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얼마나 많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이 책의 내용만 보아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에로스에 관해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모든 종합적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로스는 좋은 것과 행복에 대한 갈망이다. 육체의 유한함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은 좋은 것을 자기 자신 속에 영원히 간직하여 그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때 인간에게 불멸의 길을 열어 주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다. 에로스는 육체나 영혼의 자식을 생산하게 함으로써, 즉 육체적으로는 생식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창조를 통해 인간을 불멸케 한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이성의 아름다움, 특히 육체적 아름다움에 눈뜨면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충고한다. 지상의 일시적인 아름다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출발하여 영혼의 아름다움,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야말로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며 순도 높은 것이다. 이렇듯 『향연』은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시작해서 점차 형상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편으로는 따분할 수 있는 이데아론을 이해하기에 쉽게 하였고, 에로스라는 ‘사랑’을 주제로 하여 더욱 플라톤의 가치관이나 윤리에 대해 더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를 내리면서 그 고대의 정신이 현세에도 잘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진정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다.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이혼과 낙태, 배신과 사기가 판치는 이 현시대에 플라톤이 정말 일침을 가하는 말을 그 수천 년 전에 우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현재의 안타까움일까?...
이렇게 해서 유한한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다 보존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적인 것처럼 언제나 그냥 그대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늙어서 사라져 버리는 자가 과거의 자기와 같은 어떤 새로운 것을 뒤에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이 불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만물이 본성상 자기 자신의 소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불멸이야 말로 이 모든 열심과 사랑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멸의 공훈과 영광스러운 명성 때문에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며, 우수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하지만 심령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육체보다도 오히려 심령면에서 더 잉태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심령면에서의 잉태란, 예지와 온갖 덕을 의미한다.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 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 우리가 절제 또는 정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을 가까이하여 함께 지내면 그는 오랫동안 잉태해 왔던 것을 출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자식들이 있는 경우보다도 훨씬 더 밀접하며 사귀며 더 굳은 우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신비 중에 보다 높은 계시에 도달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마음이 바르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설사 그 용모가 그다지 환하지 못할지라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을 터득하여야 한다.
이 아름다움이란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첫 째로 그것은 영원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데서는 아름답고, 또 어떤 데서는 추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독립자존하면서 영원히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방법은 누구든지 올바른 소년애를 통해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다른 아름다움으로 올라가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는 마침내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 자체만을 아는 것이 완전한 학문으로 나아가 드디어 미의 완성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원하는 것만으로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에로스만큼 인간의 본성을 더 잘 도와주는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에로스를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이 끝나자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이후 내용은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취해서 와서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하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에 대한 찬미를 한다. 내용은 사실 거의 흠모하는 내용에 가깝다.
『향연』은 플라톤의 저서로서 삶의 방식을 탐구함에 있어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에 가 닿으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사랑이라 규정한다. 그 사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을 통해 얻어진 진리를 구체적 행위의 차원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노력의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육체의 균형미를 찬미하고, 성을 인간의 생식과 출산으로 가능해지는 아름다운 선의 전승이란 차원에서 바라보고, 원래는 하나였다가 둘로 나뉜 인간이 그 진정한 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되는 것이 동성애이며, 이 모든 것이 절대 선 그리고 진리와 지혜의 깨달음에 닿으려는 인간 혹은 철학자의 진정한 사랑함의 도정에 있어 불가분의 것임을 역설한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되는 향연 문화와 제자들에 의해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의 대상으로 추앙되는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서술하면서 플라톤 자신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얼마나 많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이 책의 내용만 보아도 알 수 가 있다.
그리고 에로스에 관해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모든 종합적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로스는 좋은 것과 행복에 대한 갈망이다. 육체의 유한함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은 좋은 것을 자기 자신 속에 영원히 간직하여 그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때 인간에게 불멸의 길을 열어 주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다. 에로스는 육체나 영혼의 자식을 생산하게 함으로써, 즉 육체적으로는 생식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창조를 통해 인간을 불멸케 한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이성의 아름다움, 특히 육체적 아름다움에 눈뜨면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충고한다. 지상의 일시적인 아름다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출발하여 영혼의 아름다움,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야말로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며 순도 높은 것이다. 이렇듯 『향연』은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시작해서 점차 형상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편으로는 따분할 수 있는 이데아론을 이해하기에 쉽게 하였고, 에로스라는 ‘사랑’을 주제로 하여 더욱 플라톤의 가치관이나 윤리에 대해 더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를 내리면서 그 고대의 정신이 현세에도 잘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진정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다.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이혼과 낙태, 배신과 사기가 판치는 이 현시대에 플라톤이 정말 일침을 가하는 말을 그 수천 년 전에 우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현재의 안타까움일까?...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