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막부 완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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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도막부 완벽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에도막부의 시대

2. 에도 막부의 개설

3. 외국과의 교역

4. 쇄국정책

5. 세태의 변천

6. 원록시대

7. 제 8대 장군 요시무네

8. 다누마 시대

9. 관정의 개혁

10. 막번체제의 쇠퇴

11. 참고자료

본문내용

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서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교활하고 영리한 상인들은 이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쾌재를 부르며 쌀을 매점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럴 즈음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가난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일어난 사람이 바로 오시오 헤이하치로였다. 1834년 노중의 자리에 오른 미즈노 다다쿠니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정치를 개혁하지 않으면 막부의 앞날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군 이에나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1841년 장군 이에나리가 죽자 다다쿠니는 비로소 정치개혁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다다쿠니는 무엇보다도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지금까지 장군 이에나리의 주변에서 권력을 휘둘러 정치를 문란시켰던 관리들을 파면함으로써 개혁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향보.관정의 개혁을 본받아 질소.검약을 권장하고 사치를 엄금하는 정책을 펴 막부의 재정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농촌에 대해서도 관정의 개혁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농민들이 기근에 견디지 못하여 에도를 비롯한 도시로 전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다다쿠니는 또 토지령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폈다. 이 정책은 에도 주위 사방 10 리와 오사카 주위 사방 5 리 안에 있는 대명.기본의 영지를 모두 막부의 직할지로 하고 이 영지 대신 다른 토지를 수여한다는 정책이었으나 그 토지의 질이 나빠 처음부터 대명과 기본들의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장군의 명령으로 토지령은 무효화되고 다다쿠니는 노중의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중단한 이래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에 의해 근대국가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유럽 제국 가운데 맨 먼저 일본에 도전한 것이 러시아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1792년 사다노부가 막무의 실권자로 있을 때 러스크만 중위가 북해도의 네무로에 나타나 교역을 요구하였다. 일본과의 무역을 포기하지 않은 러시아는 러스크만이 다녀간 지 12년 후인 1804년 다시 무역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막부에서는 쇄국정책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반년 동안이나 회답을 기다리던 러시아 사절을 돌려 보냈다. 러시아 외에도 영국은 나가사키 항내의 측량을 하는 등 자주 일본 근해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해상왕국 영국의 배는 끈질기게 일본 해안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 연안에 고래잡이를 위해 왔다가 식량과 연료.식수 등의 보급을 위해 기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양국간에 오해가 얽히고 설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던 관계로 막부에서는 1825년 외국선 격퇴명령을 내렸다. 이럴 즈음 미국의 모리슨호가 일본 어부 2명을 송환하기 위해 1837년 우라가에 입항하려 하였다. 일본에서는 격퇴명령에 따라 그 배에 포격을 퍼붓자 모리슨호는 다시 가고시마로 접근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포격을 받고 그대로 철수하였다. 모리슨호 사건이 있은 얼마 후에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온 세계를 놀라게 한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은 일본막부에도 전해졌다. 일본이 중국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1842년에는 외국선박 격퇴명령을 취소하고 원래의 방침으로 환원하였다. 이같은 사태를 예견한 네델란드 국왕 빌헬름 2세는 1844년 친서를 보내어 일본에 개국할 것을 권하였다. 네델란드 국왕의 이같은 친서는 2백년 동안 우호관계를 지켜온 네델란드의 호의이기도 하였으나 네델란드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기도 하였다. 막부는 네델란드의 사자를 후대하고 쇄국은 선조 이래 지켜온 법이므로 파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답과 아울러 충고에 감사한다는 인사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결국 막부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세계의 움직밍에 따르려 하지 않고 쇄국방침을 고소하였다. 그러나 근대산업의 발달과 기선의 발명으로 해상교통이 활발해지고 교역의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일본만이 쇄국을 고집한다는 것은 하등 의미가 없는 일로 어차피 개국을 피할 수 없는 상패에 다다르고 있었다. 국내 정치의 개혁도 순조롭지 못한 채 외국과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막부의 토대가 흔들리고 멸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오게 됐다.
11. 참고자료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민두기 편저, 일본역사, 지식산업사
이노우에 키요시, 서동만 譯, 일본의 역사, 이론과 실천
  • 가격1,8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08.12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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