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모택동의 사상
Ⅲ. 문화대혁명의 배경
1. 건설노선의 차이
2.《해서파관(海瑞罷官)》비판
3. 문화대혁명의 사회적 배경
Ⅳ. 모택동과 홍위병(紅衛兵)
1. 모택동의 이념과 야심
2. 홍위병운동의 표출
3. 중국인민의 공포와 의심
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Ⅵ. 나가며
Ⅱ. 모택동의 사상
Ⅲ. 문화대혁명의 배경
1. 건설노선의 차이
2.《해서파관(海瑞罷官)》비판
3. 문화대혁명의 사회적 배경
Ⅳ. 모택동과 홍위병(紅衛兵)
1. 모택동의 이념과 야심
2. 홍위병운동의 표출
3. 중국인민의 공포와 의심
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Ⅵ. 나가며
본문내용
이 속에서 모택동에 의해 매장되었다. 무수한 홍위병과 노동자, 농민들을 휩쓸리게 했던 문화대혁명은 종래의 당과 정부의 조직 기능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과 직장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극도의 불안 속에서 광신적으로 모택동을 숭배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인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그에 대한 예찬과 극단적인 개인숭배, 신격화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인간관계는 가족까지도 서로 불신하게 되면서 분열되었다. 당과 정부의 간부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하게 상처받았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사회의 혼란을 회복시키려는 기력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혼돈 속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고 권력기구에 재건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되었다. 진춘밍ㆍ시쉬엔, 譯 이정남외, 『앞의 책』, pp.160~161.
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모택동의 마지막 20년 집권 형태를 놓고 볼 때 문화대혁명은 발생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택동의 혁명노선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그의 전체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집권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권중달, 문명숙 편역, 『앞의 책』, p.310.
지방에서의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로 인해 국민정부를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 있어서 모택동은 대단한 기여를 했고,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 사회 내에 팽배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한 결과 중국민들이 느낀 굴욕감 등을 놓고 볼 때, 모택동의 중국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모택동은 1949년 9월 "우리는 봉기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코 사토시, 譯 임상범,『앞의 책』, 245.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모택동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1981년 6월에 나온 중국측의 공식적 평가에 따르면, 모택동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모택동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모택동의 전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를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그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1949년 이후에 거둔 실제적인 경제발전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끔찍한 혼란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공식적인 평판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어떤 학자는 모택동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Ⅵ. 나가며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야심적인 도전과 미국의 위협과 함께 급속히 증대되었던 소련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위기감을 외적인 틀로 삼았다. 국내에서도 극도의 긴장 상황을 때로는 현실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선동하면서 모택동이 갖고 있던 만족을 모르는 꿈의 추구와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 그리고 건국 이후 형성되었던 사회적 차별 구조에 대한 대항을 이용하는 것 등으로 추진되었다.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서 발동되고 영도된 정치운동으로, 모택동은 한 무리의 자산계급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중국공산당, 정부, 군대와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섞여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단위의 영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당내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는 당권파(當權派)가 중앙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형성하고 그것이 하나의 수정주의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가지고 있고 각 성, 시, 자치구와 중앙 각 부문에 모두 대리인이 있고, 과거 각종 투쟁은 모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단지 “문화대혁명”을 실행해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광대한 군중을 발동해 나와서 앞에서 기술한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야만 주자파(走資派)에게 탈취 당한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실질상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시키는 정치대혁명이다. 이런 착오의 예측에 근거해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결정했다. 이것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 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건국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現代中國論』, 희성출판사, 1989.
권중달, 문명숙 편역,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역사해석』, 집문당, 1991.
모리스 마이스너, 譯 김수영,『모택동의 중국과 그 이후』2, 이산, 2004.
신승하,『중국당대 40년사(1949~1989)』, 고려원, 1993.
아마코 사토시, 譯 임상범,『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이병주, 『중국 근대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 지식산업사, 2006
중앙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譯 허원『정통중국현대사』, 사계절, 1990.
진춘밍ㆍ시쉬엔, 譯 이정남외, 『문화대혁명사』, 나무와 숲, 2001.
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모택동의 마지막 20년 집권 형태를 놓고 볼 때 문화대혁명은 발생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택동의 혁명노선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그의 전체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집권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권중달, 문명숙 편역, 『앞의 책』, p.310.
지방에서의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로 인해 국민정부를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 있어서 모택동은 대단한 기여를 했고,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 사회 내에 팽배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한 결과 중국민들이 느낀 굴욕감 등을 놓고 볼 때, 모택동의 중국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모택동은 1949년 9월 "우리는 봉기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코 사토시, 譯 임상범,『앞의 책』, 245.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모택동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1981년 6월에 나온 중국측의 공식적 평가에 따르면, 모택동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모택동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모택동의 전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를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그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1949년 이후에 거둔 실제적인 경제발전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끔찍한 혼란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공식적인 평판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어떤 학자는 모택동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Ⅵ. 나가며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야심적인 도전과 미국의 위협과 함께 급속히 증대되었던 소련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위기감을 외적인 틀로 삼았다. 국내에서도 극도의 긴장 상황을 때로는 현실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선동하면서 모택동이 갖고 있던 만족을 모르는 꿈의 추구와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 그리고 건국 이후 형성되었던 사회적 차별 구조에 대한 대항을 이용하는 것 등으로 추진되었다.
1966년 5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모택동에 의해서 발동되고 영도된 정치운동으로, 모택동은 한 무리의 자산계급과 반혁명의 수정주의 분자들이 이미 중국공산당, 정부, 군대와 문화영역의 각계 안에 섞여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단위의 영도권이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와 인민군중의 손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당내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는 당권파(當權派)가 중앙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형성하고 그것이 하나의 수정주의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가지고 있고 각 성, 시, 자치구와 중앙 각 부문에 모두 대리인이 있고, 과거 각종 투쟁은 모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다. 단지 “문화대혁명”을 실행해서 공개적으로 전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광대한 군중을 발동해 나와서 앞에서 기술한 어두운 면을 들추어내야만 주자파(走資派)에게 탈취 당한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실질상 한 계급이 한 계급을 전복시키는 정치대혁명이다. 이런 착오의 예측에 근거해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발동을 결정했다. 이것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 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건국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現代中國論』, 희성출판사, 1989.
권중달, 문명숙 편역,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역사해석』, 집문당, 1991.
모리스 마이스너, 譯 김수영,『모택동의 중국과 그 이후』2, 이산, 2004.
신승하,『중국당대 40년사(1949~1989)』, 고려원, 1993.
아마코 사토시, 譯 임상범,『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이병주, 『중국 근대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 지식산업사, 2006
중앙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譯 허원『정통중국현대사』, 사계절, 1990.
진춘밍ㆍ시쉬엔, 譯 이정남외, 『문화대혁명사』, 나무와 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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