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네 번째 세계-경제
스스로에게 정복당한 인도
금과 은: 강함의 표시인가, 약함의 표시인가?
무력적인 진입
상관, 지사, 출장소, 선화관리인
극동의 심층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인도의 마을들
장인들과 산업
전국시장
무굴제국의 무게
무굴 제국쇠퇴의 정치적 및 비정치적 원인들
19세기의 인도의 쇠퇴
초세계-경제 속에 사로잡힌 인도와 중국
말라카의 영광
극동지방의 중심지 이동
3. 결론
2. 본론
네 번째 세계-경제
스스로에게 정복당한 인도
금과 은: 강함의 표시인가, 약함의 표시인가?
무력적인 진입
상관, 지사, 출장소, 선화관리인
극동의 심층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인도의 마을들
장인들과 산업
전국시장
무굴제국의 무게
무굴 제국쇠퇴의 정치적 및 비정치적 원인들
19세기의 인도의 쇠퇴
초세계-경제 속에 사로잡힌 인도와 중국
말라카의 영광
극동지방의 중심지 이동
3. 결론
본문내용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발전 그 자체만을 위한 도구였다. 이것은 지배의 도구이며 국제적 경쟁을 파괴하는 도구였다. 유럽의 산업은 기계화되면서 다른 나라들의 전통적인 산업을 축출해나갔다. 이때 벌어진 간격은 갈수록 더 벌어졌다. 1400-1450년부터 1850-1950년까지의 세계사의 이미지는 초기의 균등성이 15세기 말 이후 수세기간 계속되는 왜곡의 영향을 받아 점차 깨져간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무굴제국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2. 인도의 카스트제도
아리안족이 인도로 이주하면서 선주(先住) 민족을 정복하고 동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소위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특유한 사회제도가 발달했다. 바라문 또는 브라만[神官], 크샤트리아[武士], 바이샤[庶民], 수드라[奴婢] 등의 4성(姓)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의 카스트에 속하며 결혼직업 등은 동일한 카스트 내에서 행해진다. 브라만교 이후의 힌두교 제사(祭祀)는 브라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행된다. 크샤트리아는 무사계급으로서 왕족이 여기에서 나왔다. 바이샤는 농목업(農牧業)상업수공업과 기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서민계층으로, 후에 각 직종(職種)에 따라 2차 카스트가 생겼다. 카스트의 최하위는 수드라로서 대부분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고, 상위 카스트의 노비(奴婢)로 종사한다. 4성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아우트 카스트라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생겨, 이들은 거주(居住)직업 등에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간디는 이들을 신(神)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독립 후 불가촉천민제를 폐지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장학금제도를 설치하고, 의석의 일부를 할당하기도 하였다. 헌법상 카스트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나마 대도시에서는 점차로 차별이 해소되어가지만, 지방에서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다.
3. 말라카
말레이시아에 있는 항구 도시.
위치 : 말레이시아
인구 : 약 25만 1천(1990)
인구는 약 25만 1천(1990). 말레이반도의 남서부, 말라카해협에 면한다. 말라카주(州)의 주도(州都)로 말라카강(江) 어귀에 있으며 강의 좌안에 세인트폴 언덕이 솟아 있다. 말라카 해협 해상교통상 요충이며, 동남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원래는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14세기에 수마트라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창하였다. 1511년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만들어 향료 무역의 독점과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지로 삼았다. 그 후 1641년 네덜란드가 빼앗아 해협을 지배하였고, 1824년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각국의 쟁탈사는 결과적으로 말라카에 많은 사적을 남겼는데, 세인트폴 언덕의 유적을 비롯하여 세인트존 언덕의 성채가 그것이며, 이밖에 박물관도 있다. 근세에 와서는 화교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싱가포르에 밀려 연안무역항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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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굴제국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2. 인도의 카스트제도
아리안족이 인도로 이주하면서 선주(先住) 민족을 정복하고 동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소위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특유한 사회제도가 발달했다. 바라문 또는 브라만[神官], 크샤트리아[武士], 바이샤[庶民], 수드라[奴婢] 등의 4성(姓)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의 카스트에 속하며 결혼직업 등은 동일한 카스트 내에서 행해진다. 브라만교 이후의 힌두교 제사(祭祀)는 브라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행된다. 크샤트리아는 무사계급으로서 왕족이 여기에서 나왔다. 바이샤는 농목업(農牧業)상업수공업과 기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서민계층으로, 후에 각 직종(職種)에 따라 2차 카스트가 생겼다. 카스트의 최하위는 수드라로서 대부분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고, 상위 카스트의 노비(奴婢)로 종사한다. 4성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아우트 카스트라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생겨, 이들은 거주(居住)직업 등에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간디는 이들을 신(神)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독립 후 불가촉천민제를 폐지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장학금제도를 설치하고, 의석의 일부를 할당하기도 하였다. 헌법상 카스트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나마 대도시에서는 점차로 차별이 해소되어가지만, 지방에서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다.
3. 말라카
말레이시아에 있는 항구 도시.
위치 : 말레이시아
인구 : 약 25만 1천(1990)
인구는 약 25만 1천(1990). 말레이반도의 남서부, 말라카해협에 면한다. 말라카주(州)의 주도(州都)로 말라카강(江) 어귀에 있으며 강의 좌안에 세인트폴 언덕이 솟아 있다. 말라카 해협 해상교통상 요충이며, 동남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원래는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14세기에 수마트라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창하였다. 1511년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만들어 향료 무역의 독점과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지로 삼았다. 그 후 1641년 네덜란드가 빼앗아 해협을 지배하였고, 1824년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각국의 쟁탈사는 결과적으로 말라카에 많은 사적을 남겼는데, 세인트폴 언덕의 유적을 비롯하여 세인트존 언덕의 성채가 그것이며, 이밖에 박물관도 있다. 근세에 와서는 화교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싱가포르에 밀려 연안무역항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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