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네덜란드의 국내경제
- 비좁은 국토, 부족한 자연자원
- 고전압상태의 도시경제
- 다양한 인구구성
- 네덜란드의 선단
- 내부구조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2. 유럽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한다
- 핵심적인 1585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 네덜란드 대 포르투갈:상대방을 대체하기
Ⅲ. 결 론
- 농업상의 성과
- 암스테르담
- 어업
- 네덜란드 연방에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 빈민들에 대한 세금
- 사업이 왕이다
- 나머지 유럽지역과 지중해
- 네덜란드 제국의 교역의 응집성
Ⅱ. 본 론
1. 네덜란드의 국내경제
- 비좁은 국토, 부족한 자연자원
- 고전압상태의 도시경제
- 다양한 인구구성
- 네덜란드의 선단
- 내부구조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2. 유럽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한다
- 핵심적인 1585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 네덜란드 대 포르투갈:상대방을 대체하기
Ⅲ. 결 론
- 농업상의 성과
- 암스테르담
- 어업
- 네덜란드 연방에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 빈민들에 대한 세금
- 사업이 왕이다
- 나머지 유럽지역과 지중해
- 네덜란드 제국의 교역의 응집성
본문내용
국신분의회만이 아니라 각각의 주와 도시들도 애용하는 무기였다. 소비자들은 늘 이 세금의 중압에 시달렸다. 모든 관찰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17-18세기에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이곳의 조세부담이 크다는 사실이다.
1748년에 복잡한 간접세를 무너뜨리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포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개별 조세들은 다 서서히 성립되었고 많은 담세자들이 그럭저럭 익숙해 있는 형편인데 이제와서 이것들을 다 흡수할 수 있는 하나의 일반 조세라는 것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많은 수의 병졸들을 움직이는 것이 쉬운 것처럼, 많은 종류의 세금이 하나로 된 큰 단위의 세금보다 더 운용하기에 편했을 것이다. 어쨌든 언급한 것처럼 많은 병졸들과 같다는 것이 이 조세체제의 중요한 양태였다.
생활비를 비싸게 올려놓은 핵심요인인 간접세는 특히 하층민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부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타격을 피하든가 아니면 여유있게 감당해냈다. 상인들은 세관이나 시장의 진입로에서 과세대상 상품의 가격을 신고할 권리가 있었다. 이들은 그 가격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버렸으나 일단 그 지점만 넘어가면 그에 대한 확인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빌렘 4세가 스타트하우더였던 시기에 몇 차례의 폭동들이 일어난 후에야 징세청부 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직접징수 체제(홀란드주만 하더라도 여기에 5만명의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다)를 설립하는 것만으로는 이 체제의 기본적인 불평등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었다. 사실은 이것은 논리적으로 아주 당연한 결과를 가져왔다. 부유한 담세자들은 대단히 잘 정비된 이 조세체제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신분의회, 주, 도시들의 공채모집에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부채 관리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자 지급을 못하는 일은 결코 없으므로 어느 누구도 자본을 회수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더구나 그들이 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리하게 협상을 할 수 있다.
국고란 일반인들의 금고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금고는 가득차 있으나 국고는 거의 텅비어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재정상으로 약간의 손질을 해서, 특히 가구당 조세를 통해서 큰 재원을 모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필요한 경우라는 것은 언제나 있었다. 전쟁은 끝없는 심연이었고 인공적인 인공적이라는 것은 네덜란드의 지대가 낮아서 많은 땅이 해수면보다 아래에 있으므로 제방이나 댐 등으로 물을 막고 개간을 통해서 땅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국가인 네덜란드는 매년 다시 만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다시 높은 생활비의 문제로 되돌아왔다. 생활비가 비싸다는 것은 세계-경제의 핵심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점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이것 역시 어느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마도 이 이점은 활발한 생산이 뒷받침될 때에만 적절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18세기에 들어가면 생산은 감소한 반면에 임금은 높은 수준에서 화석화되었다. 조세가 분명히 여기에 응분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연방이 강한 국가였다는 것은 이 공화국이 황금의 세기 동안 수행한 대외정책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명백히 쇠퇴하는 1680년경까지 계속된다. 소위 30년전쟁이 일어났던 1618-1648년 동안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함스부르크 왕조, 부로봉 왕조, 리슐리외, 올리바레스, 마자랭 등만 전면에 내세웠으나 사실 지배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주 흔히는 네덜란드가 아니었을까? 외교의 얽힌 실타래는 헤이그에서 풀렸다가 이곳에서 다시 꼬이곤 했다. 덴마크(1626), 스웨덴(1629), 프랑스(1635)의 참전이 차례로 결정된 곳도 헤이그였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존경받는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그러하듯이 네덜란드는 전쟁이 자국 국경선 밖에서 일어나도록 조치했다. 그들의 국경위에 있는 많은 요새들은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강들의 지류 때문에 공략하기 힘든 이 지역에 더욱 강고한 장애물을 보탰다. 용병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선별된 정예들이었고 높은 보수를 받고 잘 먹었으며 가장 세련된 전쟁들을 통해서 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가 하나의 안전한 섬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감시했다.
1669-1670년에 유럽 전체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네덜란드의 전권을 수중에 단단히 잡고 있던 대사법관 얀 데 비트와 루이 14세의 대사인 아르노 드 퐁폰 제독 사이에서 정중하게 한걸음씩 진적되던 협상이었다. 이들의 토의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네덜란드 측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대표에 대해서 열등 콤플렉스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프랑스 대사에게 아주 차분하게 왜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마음대로 요리할 능력이 거의 없는지 설명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비록 이 나라가 정부로서보다는 차라리 경제적 중량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성장해 올라가면서 네덜란드의 세력을 잠식했고 그럼으로써 점차 네덜란드의 부족한 면과 이들의 취약성을 폭로했으나, 그것은 완수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과정이었다.
- 사업이 왕이다
유리한 것이든 적대적인 것이든 많은 사건들을 겪어 나가는 가운데 네덜란드의 정책과 삶이 늘 지키고 수호하려고 했던 것은 총체적인 상업이익이었다. 이 이익이야말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포괄하는 요소였다.
자국의 동인도회사 때문에 안달하고 이 회사의 특권들을 질시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경쟁국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지의 동인도회사나 더 나아가서 오스텐데 회사 18세기초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독점체제를 무시하고 이 회사의 활동영역에 불법으로 침투하는 사람들이 여러 도시에서 회사를 결성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이 오스텐데 회사였다. 이 회사는 황제인 카를 6세의 특허장을 받고 설립되었다.
같은 것을 설립하거나 혹은 자본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 사실 놀랍지 않은가?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기 나라 배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1748년에 복잡한 간접세를 무너뜨리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포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개별 조세들은 다 서서히 성립되었고 많은 담세자들이 그럭저럭 익숙해 있는 형편인데 이제와서 이것들을 다 흡수할 수 있는 하나의 일반 조세라는 것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많은 수의 병졸들을 움직이는 것이 쉬운 것처럼, 많은 종류의 세금이 하나로 된 큰 단위의 세금보다 더 운용하기에 편했을 것이다. 어쨌든 언급한 것처럼 많은 병졸들과 같다는 것이 이 조세체제의 중요한 양태였다.
생활비를 비싸게 올려놓은 핵심요인인 간접세는 특히 하층민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부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타격을 피하든가 아니면 여유있게 감당해냈다. 상인들은 세관이나 시장의 진입로에서 과세대상 상품의 가격을 신고할 권리가 있었다. 이들은 그 가격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버렸으나 일단 그 지점만 넘어가면 그에 대한 확인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빌렘 4세가 스타트하우더였던 시기에 몇 차례의 폭동들이 일어난 후에야 징세청부 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직접징수 체제(홀란드주만 하더라도 여기에 5만명의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다)를 설립하는 것만으로는 이 체제의 기본적인 불평등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었다. 사실은 이것은 논리적으로 아주 당연한 결과를 가져왔다. 부유한 담세자들은 대단히 잘 정비된 이 조세체제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신분의회, 주, 도시들의 공채모집에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부채 관리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자 지급을 못하는 일은 결코 없으므로 어느 누구도 자본을 회수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더구나 그들이 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리하게 협상을 할 수 있다.
국고란 일반인들의 금고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금고는 가득차 있으나 국고는 거의 텅비어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재정상으로 약간의 손질을 해서, 특히 가구당 조세를 통해서 큰 재원을 모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필요한 경우라는 것은 언제나 있었다. 전쟁은 끝없는 심연이었고 인공적인 인공적이라는 것은 네덜란드의 지대가 낮아서 많은 땅이 해수면보다 아래에 있으므로 제방이나 댐 등으로 물을 막고 개간을 통해서 땅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국가인 네덜란드는 매년 다시 만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다시 높은 생활비의 문제로 되돌아왔다. 생활비가 비싸다는 것은 세계-경제의 핵심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점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이것 역시 어느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마도 이 이점은 활발한 생산이 뒷받침될 때에만 적절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18세기에 들어가면 생산은 감소한 반면에 임금은 높은 수준에서 화석화되었다. 조세가 분명히 여기에 응분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연방이 강한 국가였다는 것은 이 공화국이 황금의 세기 동안 수행한 대외정책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명백히 쇠퇴하는 1680년경까지 계속된다. 소위 30년전쟁이 일어났던 1618-1648년 동안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함스부르크 왕조, 부로봉 왕조, 리슐리외, 올리바레스, 마자랭 등만 전면에 내세웠으나 사실 지배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주 흔히는 네덜란드가 아니었을까? 외교의 얽힌 실타래는 헤이그에서 풀렸다가 이곳에서 다시 꼬이곤 했다. 덴마크(1626), 스웨덴(1629), 프랑스(1635)의 참전이 차례로 결정된 곳도 헤이그였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존경받는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그러하듯이 네덜란드는 전쟁이 자국 국경선 밖에서 일어나도록 조치했다. 그들의 국경위에 있는 많은 요새들은 그렇지 않아도 수많은 강들의 지류 때문에 공략하기 힘든 이 지역에 더욱 강고한 장애물을 보탰다. 용병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선별된 정예들이었고 높은 보수를 받고 잘 먹었으며 가장 세련된 전쟁들을 통해서 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가 하나의 안전한 섬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감시했다.
1669-1670년에 유럽 전체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네덜란드의 전권을 수중에 단단히 잡고 있던 대사법관 얀 데 비트와 루이 14세의 대사인 아르노 드 퐁폰 제독 사이에서 정중하게 한걸음씩 진적되던 협상이었다. 이들의 토의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네덜란드 측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대표에 대해서 열등 콤플렉스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프랑스 대사에게 아주 차분하게 왜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마음대로 요리할 능력이 거의 없는지 설명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비록 이 나라가 정부로서보다는 차라리 경제적 중량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성장해 올라가면서 네덜란드의 세력을 잠식했고 그럼으로써 점차 네덜란드의 부족한 면과 이들의 취약성을 폭로했으나, 그것은 완수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과정이었다.
- 사업이 왕이다
유리한 것이든 적대적인 것이든 많은 사건들을 겪어 나가는 가운데 네덜란드의 정책과 삶이 늘 지키고 수호하려고 했던 것은 총체적인 상업이익이었다. 이 이익이야말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포괄하는 요소였다.
자국의 동인도회사 때문에 안달하고 이 회사의 특권들을 질시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경쟁국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지의 동인도회사나 더 나아가서 오스텐데 회사 18세기초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독점체제를 무시하고 이 회사의 활동영역에 불법으로 침투하는 사람들이 여러 도시에서 회사를 결성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이 오스텐데 회사였다. 이 회사는 황제인 카를 6세의 특허장을 받고 설립되었다.
같은 것을 설립하거나 혹은 자본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 사실 놀랍지 않은가?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기 나라 배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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