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41第四十一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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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열국지 41第四十一回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쪽을 대응하여 학처럼 바라본다.
戎夷金木之戶外,蠻狄水火而位配。
서융과 동이는 금과 목의 지게문 밖에 있고, 남만과 북적은 물과 불의 위치에 배열된다.
九采外之右以成列,四塞外之左而遙對。
9채는 외부에 우측에서 나열되며 4방 변방의 밖은 좌측으로 멀리 대응한다.
朱干玉戚,森聳以相參;
붉은 장대와 옥 도끼와 빽빽하게 솟아 서로 참여한다.
龍旗豹韜 韜(감출 도; -총19획; tao)
,抑揚而相錯。
용의 깃발과 표범의 도의 억양이 서로 어긋난다.
肅肅,巒崇壑深。
엄숙하고 침착하여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다.
煙收而卿士齊列,日出而天始臨。
연기가 거두어지고 경과 사들이 나열하며 일출이 되면 천자의 용안이 비로소 임하네.
戴冕旒 旒(깃발 류{유}; -총13획; liu)
以當軒,見八紘 紘(갓끈, 굵은 밧줄 굉; -총10획; hong)
之稽;
면류관을 쓰고 깃발을 들며 처마가 되며, 8개 갓끈을 쓴 이마를 조아리네.
負斧 (병풍, 숨기다 의; -총10획; y)
而南面,知萬國之歸心。
도끼를 지고 숨어서 남면하며 만국의 돌아가는 마음을 아네.
王宮左右,又別建館舍數處,晝夜工,月餘而畢。
왕궁의 좌우에 또 따로 별관을 수곳을 지어서 낮과 밤에 공사하니 1달여에 다 지었다.
傳檄諸侯:「俱要五月朔日,踐土取齊。」
여러 제후에게 방을 내니 모두 5월 초하룻날에 천토에 일제히 모이라.
是時,宋成公王臣,齊昭公潘,俱係舊好;
이 때 송성공 왕신, 제소공 번이 모두 오랜 우호를 연계하였다.
鄭文公捷,是新附之國;
정문공 첩은 새로 붙은 나라였다.
率先來赴。
먼저 인솔하고 이르렀다.
他如魯僖公申,與楚通好;
노희공 신은 초나라와 우호를 통했다.
陳穆公款,蔡莊公甲午,與楚連兵;
진목공 관과 채장공 갑오는 초나라와 군사를 연합하였다.
都是楚黨,至是懼罪,亦來赴會。
모두 초나라의 당이니 죄를 두려워하여 또한 이르러 모였다.
(나라 이름 주; -총9획; zhu)
小國,自不必說。
주나라와 거나라 소국은 스스로 반드시 말할 필요도 없다.
惟許僖公業,事楚最久,不願從晉。
오직 허나라 희공 업은 초나라를 섬김이 가장 오래되어 진나라를 따르길 원치 않았다.
秦穆公任好 <인명>중국 춘추 시대 진(秦) 나라 제9대 왕(?~B.C.621). 성은 영(). 이름은 임호(任好).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유여(由余), 백리해(百里奚) 등의 현사(賢士)를 얻어, 선정을 베풀며 국력을 신장하고 국토를 넓혀 천 리에 달했다고 한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659~기원전 621년이다.
,雖與晉合,從未與中國會盟,遲疑不至。
진목공 임호는 비록 진나라와 합하나 중국과 동맹을 더불지 않으려고 하며 늦게 의심하여 이르지 않았다.
衛成公鄭,出在襄牛;
위성공 정은 양우를 나와 있었다.
曹共公襄,見拘五鹿;
조공공 양은 오록을 잡혔다.
晉侯曾許以復國,未明赦,亦不與會。
진나라 제후는 나라를 회복하길 허락하니 아직 사면을 밝히기 전에 또한 더불어 모이지 않았다.  
單說衛成公聞晉將合諸侯,謂寧曰:
단지 위성공이 진나라가 제후를 규합함을 듣고 위녕에게 말했다.
「徵會不及於衛,晉怒未息也。寡人不可留矣!」
위나라에 기회가 아직 이르지 않으며 진나라의 분노가 아직 그치지 않았네. 과인은 머물 수 없네.
寧對曰:「君徒出奔,誰納君者!不如讓位於叔武,使元奉之,以乞盟於踐土,君若爲遜避而出。天如祚衛,武獲與盟,武之有國,猶君有之。況武素孝友,豈忍代立?必當爲復君之計矣。」
衛侯心雖不願,到此地位,無可奈何,使孫炎以君命致國於叔武,如寧之言。
孫炎領命,往楚丘去了。衛侯又問於寧曰:「寡人今欲出奔,何國而可?」躊躇未答。衛侯又曰:「適楚何如?」對曰:「楚雖婚姻,實晉仇也,且前已告,不可復往,不如適陳。陳將事晉,又可藉爲通晉之地也。」衛侯曰:「不然,告非寡人意,楚必諒之。晉楚將來,事未可定。使武事晉,而我託於楚,兩途觀望,不亦可乎?」衛侯遂適楚,楚邊人追而之;乃改適陳,始服寧之先見矣。孫炎見叔武,致衛侯之命。武曰:「吾之守國,攝也,敢受讓乎?」同元赴會。使孫炎回復衛侯,言:「見晉之時,必當爲兄乞憐求復也。」元曰:「君性多猜忌,吾不遣親子弟相從,何以取信?」乃使其子元角,伴孫炎以往,名雖問候,實則留質之意。公子犬私謂元曰:「君之不復,亦可知矣。子何不以讓國之事,明告國人,擁立夷叔而相之?晉人必喜。子挾晉之重以臨衛,是子與武共衛也。」元曰:「叔武不敢無兄,吾敢無君乎?此行且請復吾君矣。」犬語塞而退。恐衛侯一旦復國,元洩其言,未免得罪,乃私往陳國,密報衛侯,反說:「元已立叔武爲君,謀會晉以定其位。」衛成公惑其言,以問孫炎。孫炎對曰:「臣不知也。元角見在君所,其父有謀,角必與聞,君何不問之?」衛侯復問於元角,角言無是事。寧亦言曰:「若不忠於君,肯遣子出侍乎?君勿疑也。」公子犬私見衛侯曰:「之設謀拒君,非一日矣。其遣子,非忠於君也,將以窺君之動靜,而爲之備也。若使乞憐於晉,以求復吾君,必辭會而不敢與,如公然與會,則爲君信矣。君其察之。」衛侯果陰使人往踐土,伺察叔武元之事。胡曾先生有詩云:
    弟友臣忠無間然,何堪犬肆讒言?從來富貴生猜忌,忠孝常含萬古。
  說周襄王以夏五月丁未日,駕幸踐土。晉侯率諸侯,預於三十里外迎接,駐王宮。襄王御殿,諸侯謁拜稽首。起居禮畢,晉文公獻所獲楚於王,──被甲之馬凡百乘,步卒千人,器械衣甲十餘車。襄王大悅,親勞之曰:「自伯舅齊侯世之後,荊楚復,憑陵中夏,得叔父仗義伐,以尊王室,自文武以下,皆賴叔父之休,豈惟朕躬?」晉侯再拜稽首曰:「臣重耳幸殲楚寇,皆仗天子之靈,臣何功焉?」
  次日,襄王設醴酒以享晉侯。使上卿尹武公,內史叔興,策命晉侯爲方伯。賜大輅之服,服冕;戎輅之服,服韋弁;弓一,矢百,弓十,矢千,一,虎賁之士三百人。宣命曰:「爾晉侯,得專征伐,以糾王慝。」晉侯遜謝再三,然後敢受。遂以王命布告於諸侯。襄王復命王子虎,冊封晉侯爲盟主,合諸侯修盟會之政。晉侯於王宮之側,設下盟壇,諸侯先至王宮行覲禮,然後各趨會所。王子虎監臨其事。晉侯先登,執牛耳,諸侯以次而登。元已引叔武謁過晉侯了。是日,叔武攝衛君之位,附於載書之末。子虎讀誓詞曰:「凡同盟,皆王室,毋相害也。有背盟者,明神之,殃及子孫,隕命祀!」諸侯齊聲曰:「王命修睦,敢不敬承!」各各血爲信。潛淵讀史詩云:
    晉國君臣建大猷,取威定伯服諸侯。揚旌城觀,連袂王宮覲冕旒。更羨今朝盟踐土,誇當日會葵邱。桓公末路留遺恨,重耳能將此志酬。
盟事畢,晉侯欲以叔武見襄王,立爲衛君,以代成公。叔武涕泣辭曰:「昔寧母之會,鄭子華以子奸父,齊桓公拒之。今君方繼桓公之業,乃令武以弟奸兄乎?君侯若嘉惠於武,賜之矜憐,乞復臣兄鄭之位。臣兄鄭事君侯,不敢不盡!」元亦叩頭哀請,晉侯方首肯。不知衛侯何時復國,再看下回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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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30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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