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이란 인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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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두한이란 인물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1. 출생배경

2. 성장배경

3. 김두한이 유명해질 수 있게 만든 계기

4. 김두한이 역사에 남긴 것

5. 김두한의 인간관계 및 인간적 특성

6. 김두한이란 인물에 대한 나의 생각

7. 김두한의 말년

8. 김두한의 후손들

9. 연표

10. 참고문헌

본문내용

실장도 김형욱 부장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나는 속으로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워낙 한쪽으로 쏠려 그냥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김 부장이 김두한이를 끝까지 다그쳐서 자백을 받아 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결국 대통령도 오판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JP계는 아니지만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찬이 끝나고 한 사람씩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나갈 때 나는 일부러 맨 마지막에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는 대통령과 악수하며 이렇게 말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더니 식당 옆의 서재로 데려 갔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각하, 오늘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저는 대통령 한 분만 보고 공화당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 만큼 결코 JP를 옹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듯했다.
“오늘 이야기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경향신문 기사는 울산지국에서 올라 온 것이고, 김택수 의원이 돈을 건네 준 것은 사식이라도 사 먹으라고 인간적인 정리에서 준 것입니다. 김택수 의원이 본래 인정이 많은 사람 아닙니까. 김 의원은 누구한테 사주를 받아 연설할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제 얘기가 진실입니다. 몇 사람이 짜고 각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이렇게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의 입이 떨어졌다. “알았소.”
그러나 내 직언은 먹혀들지 않았다. 김두한 의원은 이후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몇 달 뒤 을지로의 화정이라는 음식점에 들렀다가 김두한 의원 부부와 마주쳤을 때 나는 눈을 의심해야 했다.
몸이 수척해 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옛날의 그 당당하던 기개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던지 내 눈빛조차 피할 정도였다. 말도 또렷하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아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두한 의원은 그래도 고집이 있어 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수원 화성에서 출마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폭력에 짓밟혀 어처구니없이 말년을 망친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움을 가눌 길이 없다.
8. 김두한의 후손들
우선 김두한의 딸은 김을동으로 연예인이면서 2008년도에는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그녀의 학력은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년 중퇴이고, 바로 연예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경력으로는 동아방송 성우, 연극배우, TBC, KBS 탤런트, KBS 극회 부회장, 한국연예인노동조합 대의원, 대한독립유공자협회 이사, 사단법인 한양여성팔각회 회장, 서울시 시의회의원(전국 최다득표 당선), 한민족운동단체연합 공동의장, 전주 우석대학교 겸임교수, 제16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문화특보, 사단법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상임이사(현), 영광군 홍보대사(현)
현재 그녀는 서울시 시의회의원으로 출마해서는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고, 16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문화특보를 역임했다. 지난 총선에서는 후보로 출마, 2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해 그 인지도와 대표성을 입증했다. 한나라당 성남 수정지구당 위원장으로서 이번 총선에서 무경선 공천가능성이 높은 것도 이 같은 경쟁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연기생활 외에 민족사업도 활발히 전개해 한민족운동단체연합 공동의장을 지냈고, 현재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다. 수많은 독립선열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받은 민족운동을 전개해왔고, 또 17대 국회에 동원해 이 같은 민족사업을 국가적으로 계승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김두한의 외손자이며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다. 송일국 또한 어머니와 같은 연예인이다. 그의 학력은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나와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영화학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연예인으로써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특히 경력사항으로는 손기정 평화마라톤대회 홍보대사, 경상남도 통영시 명예시민, 서울특별시 홍보대사, 국세청 명예홍보위원 등의 여러 경력이 있다.
9. 연표
191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탄생.
1920년(4세) 아버지 김좌진 장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대파.
1927년(11세) 외할머니·어머니 사망.
1930년(14세) 외숙댁 가출. 혼자 서울로 상경. 거지 왕초에게 붙들려 거지 생활.
1932년(16세) 쌍칼에게 영입돼 주먹 세계 입문.
1934년(18세) 신마적, 구마적 등을 꺾고 종로 우미관 뒷골목 주먹 황제로 등극.
1945년(29세) 조선건국청년회 창립위원
1946년(30세) 대한민청 감찰부장 겸 별동대장으로 좌익 파업 진압 활동.
1947년(31세) 전국학생연맹 고문, 미군정에서 사형 선고 받고 오키나와 형무소에 수감.
1948년(32세) 건국 특별 사면 대상자로 석방.
1949년(33세) 대한청년단 중앙본부 건설국장
1950년(34세) 대한학도의용군 참장
1952년(36세)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1954년(38세)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 당선 3일 만에 김관철 살해 미수 사 건으로 구속됐으나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
1958년(42세) 4대 민의원 선거 출마, 낙선.
1963년(47세) 제6대 국회의원(용산 보선 한독당)
1965년(49세) 보궐선거에 한독당 공천받고 입후보, 당선.
1966년(50세)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고문당함.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 로 의원직 박탈.
1972년(56세)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
10. 참고문헌
김두한 김두한자서전
네이버 http://kin.naver.com/
국가기록포탈 http://www.byonughoon.net/Useful/htm-history/1966-09-16.htm
김을동 http://www.kimeuldong.com/
네이버 인물 송일국 ht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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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03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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