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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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자연
*지질
*지형
*기후
*식물
*동물
*역사
*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 고대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흥륭
* 노예무역에서 합법무역으로 전도(傳道
* 탐험의 시대
* 식민지시대
* 아프리카 분할 초기

본문내용

체가 정착성이 낮은 것과 관계가 있다), 노동력에 부응하는 토지이용권(토지를 오래 소유하면 실질적으로 소유에 가까운 성격을 띠지만, 임대·매각은 불가능하다)이 문제였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농업생산력은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목축
낙타·소 등 큰 가축을 중심으로 한 유목(遊牧)과, 양·염소·당나귀·말·돼지·집오리·색시닭 등의 사육을 들 수 있다. 유목민으로는 사하라사막의 투아레그족과, 에티오피아 북동부에서 소말리아·케냐 일부에 걸친 지방의 베자·암하라·소말리 등의 여러 부족이 있다. 사하라사막의 아랍화한 베르베르족은 오아시스농경과 함께 낙타·말·양·염소 등의 목축도 하였으며, 특히 낙타를 이용하여 사하라사막의 장거리교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투아레그족에게 낙타는 전쟁용이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주로 짐을 운반하는 데에 사용하였고 젖도 식량으로 이용하였다. 소도 몇몇 종족에서 사육되었다. 동아프리카 반투계의 많은 사회에서도 소는 중요하며, 남아프리카의 부시먼과 인종적·언어적으로 가까운 호텐토트족도 유목을 해왔다. 그 밖에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남부에서도 작고 뿔이 짧은 소가 일부 곡물농경민(부르키나파소의 로비족 등)에 의해 결혼시 남편이 부인의 집에 지불하는 자산으로 사육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소는 귀중한 재산이고 우유도 다양한 식품으로 이용되었지만, 의례상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잡아먹지 않았던 사회가 많았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의 나일계 부족들 사이에서는 소의 목에 화살을 꽂아서 피를 마시는 관습도 있었다. 서아시아에서 사하라를 거쳐 도입된 말은 서아프리카 사바나의 사회에서 왕후나 전사의 기마용으로 중요시되었고, 신속히 이동하여 적을 제압하는 데에 유효한 군사수단으로서 국가형성이나 지배의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나 말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사회에서 운반용이나 농경용으로 거의 이용되지 않았던 것은, 이들 사회의 기술·경제상의 성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예로부터 짐의 운반은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아프리카 전역에서 나귀가 이용되어 왔으며, 양이나 염소의 사육으로 고기와 가죽을 얻었다. 양·염소 등의 작은 가축이나 닭, 그리고 서아프리카가 원산인 색시닭 등의 가금(家禽)은, 조상의 제사나 기우제(祈雨祭)에 제물로 자주 사용되었다.
교역
채집수렵민·어로민·목축민 등은 농경민과 물물교환을 하여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농경민 상호간에도 시장을 통해 생산물을 교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교환이 아닌 전문적인 상업집단이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상품을 운반하는 교역도 이루어졌으니, 그 가운데 가장 대규모적인 것은, 아랍의 북아프리카 진출 뒤 8세기 무렵에 시작되어 14∼16세기에 최성기를 누린,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흑인사회와의 교역일 것이다. 북아프리카로부터는 말·장신구·의상·구리 등이 도입되었고, 남부로부터는 노예와 금이 운반되었다. 이러한 교역을 기반으로 사하라 이남에서는 가나·말리·송하이 등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흑인제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배체제의 흥망(興亡)이나 북아프리카의 상황에 따라 사하라의 주요한 교역로도 초기에는 서쪽 끝의 모로코와 가나왕국(지금의 모리타니 남동부)을 연결한 선에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리비아·튀니지와 차드호수 주변을 연결한 곳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특히 사하라의 암염(岩鹽)과 블랙아프리카의 금(砂金) 교역은 교역의 지역적 범위를 넓혔다. 이 교역을 담당한 것은 베르베르인이었으며, 운반수단으로서는 낙타가 사용되었다. 한편, 블랙아프리카에서 북아프리카로 대량 유입된 금으로 인해 말리는 <황금의 나라>라는 소문이 지중해세계로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아랍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해로(海路)로 말리에 가고자 하였던 유럽인들의 염원은 15세기 서아프리카탐험항해로 나타났으며,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해로를 열었다. 당시 사하라종단교역에서 흑인쪽 부분을 담당하고, 동쪽과 남쪽의 사바나에서부터 삼림지대로까지의 장거리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만데계(系) 상업집단이었다. 이들은 이슬람화되어 있었으며, 베짜기 등의 기술도 가지고 있어서 혈연의 유대에 바탕을 둔 교역망을 서아프리카내륙으로 돌리고,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면직물·암염·노예 등을 팔았다. 만데계 상인보다는 활동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과 요루바족도 다른 지역을 잇는 상업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의 상업활동에 의하여 수많은 도시가 생겨났다. 동아프리카의 해안으로는 아랍상인들이 배를 이용해 도래하였으며, 12∼16세기까지 환인도양교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아프리카로부터는 금·상아·노예가, 인도나 동남아시아로부터는 진주·장신구·향신료가 도입되었으며, 교역의 거점인 몸바사·킬와·잔지바르 등의 항구도 번성하였다. 아랍인과의 오랜 기간에 걸친 직접교류의 결과로, 동아프리카의 해안지방에서 흑인문화와 아랍문화가 결합한 스와힐리문화가 형성되었다.
공예
북아프리카에서 발달한 모직물·가죽공예·금속세공·장신구·도기(陶器) 등과는 대조적으로, 블랙아프리카에는 나무·흙·짚을 소재로 한 목조품, 유약을 칠하지 않은 토기, 기법과 형태가 다양한 바구니 등이 있다. 정교한 구리나 은의 세공이 발달한 북아프리카에 비해, 사하라 이남에서는 산화철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철제품(괭이의 날이나 창·화살촉, 작은 칼 등)이 널리 만들어졌다. 이에 반해 콩고민주공화국 일부 등 한정된 지역에서만 산출되었던 구리의 경우 보다 가공하기 쉬운 금속의 세공(청동·놋쇠의 팔찌, 발찌 등의 장신구와, 나이지리아 베냉왕국의 것으로 유명한 왕의 기념상과 금의 무게를 다는 추 등)은 발달이 뒤떨어졌고, 게다가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졌다. 철은 단조(鍛造)만 이루어졌고 주조기술(鑄造技術)이 없어 북아프리카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실랍법(失臘法)으로 청동이나 놋쇠를 가공하였다. 이러한 공예의 대부분은 특수한 세공인집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철을 가공하는 대장장이는 세공인집단에서 내혼(內婚)을 하고,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켰다. 또한 사회적 특권이나 특수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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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5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9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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