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과 삼국연의, 한유와 유종원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나관중과 삼국연의, 한유와 유종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나관중과 삼국연의, 한유와 유종원

본문내용

의 지지자였지만, 그들이 모두 한유와 같은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유는 유종원 등과 달리 사상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했다. 그래서 한유의 사상은 그의 동료나 후계자들에 의해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게 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리학파 또는 주자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태산북두 <泰클 태,山뫼 산,北북녘 북,斗별이름 두>
☆겉뜻 ; 태산과 북두칠성이라는 뜻
☆속뜻 ;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는 말 또는 학문이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나 대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유래 ; 한유(韓愈)는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자이자 사상가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당나라의 대표적 4대 시인의 한 사람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히는 중국 제일의 문장가이다. 그는 25세 때 진사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과 파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뒤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유는 순탄하지 못했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학문과 사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친구인 유종원 등과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고문이 송대 이후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게 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지는 등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사상 분야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여 공자 이래의 유학을 왕성하게 하는 데에 힘써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
유종원의 자는 자후(子厚)이며 원적은 오늘 산서성 영제(永濟)인데 후에 장안에 자리를 옮겨습니다. 유종원을 유하동(柳河東),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릅니다. 유종원은 관리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종원의 아버지 유진(柳鎭)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등 관직을 맡았었습니다.
유종원의 소년시절은 당나라 중기 각종 사회폐단과 당쟁으로 동란이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유종원의 아버지는 관직이 자주 바뀜에 따라 자리를 옮겼는데 유종원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닐 기회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 과정에 유종원은 사회와 접촉하고 시야를 넓혔습니다.
정원(貞元) 9년(793년) 21살인 유종원은 과거에 급제해 진사로 되였습니다. 이 시기 유종원은 유우석(劉禹錫)을 절친한 친구로 사귀였습니다. 정원 19년 장안에 돌아온 유종원은 입조해 어사(御史)의 견습관으로 있으면서 왕숙문(王叔文) 등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왕숙문을 대표로 하는 신정(新政)세력은 국가통일과 황권을 수호하기 위해 개혁운동인 영정(永貞)혁신을 진행했습니다. 왕숙문이 정치 대권을 잡자 유종원은 혁신을 추구하는 핵심성원으로 되였습니다. 유종원은 혁신운동의 결책자의 한 성원으로 영정혁신의 앞장에 섰습니다. 영정혁신 기간 유종원은 유물주의 철학사상을 보여준 저서를 집필했는데 저서중 [천설(天說)], [천대(天對)], [비국어(非國語)] [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영정혁신이 귀족,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에 귀족, 관료들은 힘을 합세해 혁신세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영정원년 5월 왕숙문은 직위를 박탈당했고 그 이듬해 살해당했습니다. 유종원도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은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유종원은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 등과 친교를 맺고 당나라 시기 고문(古文)운동을 창도했습니다. 유종원은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였습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교, 도교, 불교를 참작하여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롭고 합리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유종원은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散文)에도 능해 당송시기 8대 산문가의 한사람으로 되였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문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 정채함은 특히 뛰어났습니다. 시는 산수시를 특히 잘 지어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유종원은 송별시,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웅대하면서 깊고 우아하면서 기운차다] 이는 유종원 작품에 대한 한유의 평가입니다. 왜냐하면 유종원의 문장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두드러진 인상은 [준결함]이니까 [깊으면서 명료하고 우아하면서 기운차다]는 한유의 평가가 적중한 평가라고 할수 있습니다.
유종원은 혁신가로 전통 관념에의 속박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도 [문이명도(文以明道)]라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도(道)]에 관해서 그 나름대로 독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도에 다다름은, 사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이다.](報崔?秀才論文書) 문장의 작용은 바로 [시대에 도움이 되고 만물에 혜택을 준다], [시대에 이로움이 있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을 중시하며 오로지 사조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유종원은 [무릇 글을 하나 짓는데 문채를 풍부하게 하는데 힘쓴다. 사실을 돌아보지 않고 꾸미고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펼쳐놓아 그 빛나는 것으로 후생을 유혹하여 치우치는 것으로 끝맺게 되니 이는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으로 함정을 덮어놓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유종원의 저서에는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습니다.
한유· 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0.05.02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728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