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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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멕시코 유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치첸이싸(Chichen Itza)

코판(Copan) 마야유적지

우스말(Uxmal)

팔렌케(Palenque)

올메까(Olmeca)

떼오띠우아깐(Teotihuacan)

똘떼까(Tolteca)

본문내용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강대한 세력의 출현이 필요하였다. 떼오띠우아깐의 멸망 후 2세기 동안 그런 실력자는 나타나지 않은 듯 했으나, 드디어 AD 9세기 말엽에 치치메까의 일족인 똘떼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똘떼까 왕국의 중심을 뚤라(Tula)였다. 그곳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것은 똘떼까-치치메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 자체는 모순된 용법이었다. 우선 똘떼까란 또얀(Tollan)이라는 전설적인 도시 출신자를 뜻하였고, 높은 교양과 능력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였다. 거기에 비해 치치메까란 개의 자손을 의미하였고 멕시코 북부의 건조지대와 거기에 뻗어있는 농경 전선사이에서 이동생활을 영위하는 수렵민을 일컬었다. 즉 뚤라에는 떼오띠우아간 이래의 도시 문명의 전통을 잇는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문명을 그리워하면서 모여든 수렵민 출신의 전사(戰士)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뚤라에는 이질적인 두 개의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적인 교양인과 용맹스런 전사인 것이다. 껫쌀꼬아뜰(Quezalcoatl)추방의 전설은 이와 같은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똘떼까 시기에는 전사계급이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똘떼까 사회는 점차로 군국주의화 되어갔다. 재규어와 독수리 전사들의 규칙과 인신공희 의식이 자주 행해졌다. 많은 조각작품 속에서 무사의 모습이 등장하고 죽음이라 지배적인 주제를 담은 작품이 등장한다. 뚤라 안에 충만한 산 제물의 암시는 물과 농경을 지배하는 껫살꼬아뜰신의 신앙보다 더욱 높았으며, 이것은 우주와 인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산 제물의 사상이 똘떼까인에 의해 내세워졌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껫살꼬아뜰은 추방되었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주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농경과 물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똘떼까인들은 그 종교 체계 내부에 평화와 전쟁, 문화와 투쟁, 산 제물에 대한 부정과 적극적인 긍정의 두 사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즉 똘떼까의 종교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똘떼까족은 회화, 벽화, 조각을 창안하였고, 나무껍질이나 용설란 종이에 흠을 파 나타낸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그들은 장엄한 왕궁의 건축가로서,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모자이크하여 방패와 장신구를 멋지게 장식하는 걸출한 장인이었다. 뚤라와 똘떼까인의 세력이 미쳤던 여러 중심지는 12세기 중엽에 와해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똘떼까족은 북쪽에서 몰려드는 야만족과 더 이상 융화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변화하자 새로 이주한 야만족들과 똘떼까족 사이의 균형이 파괴되어 똘떼까족은 뚤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일부는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똘떼까족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도시국가들을 세웠다. 또 다른 부류는 뿌에블라 계곡의 촐룰라(Cholula)로 이주하거나, 마야 문명의 세력권인 유까딴 반도의 치첸니사(Chichen Itza)까지 옮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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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0.05.31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6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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