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정의와 성격, 조선시대 당쟁(붕당정치)과 공론대두,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전개,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부정적 측면,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긍정적 측면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정의와 성격, 조선시대 당쟁(붕당정치)과 공론대두,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전개,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부정적 측면,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 긍정적 측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정의

Ⅲ.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성격

Ⅳ. 조선시대 당쟁(붕당정치)과 공론대두

Ⅴ.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전개

Ⅵ.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부정적 측면

Ⅶ.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긍정적 측면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않고, 귀족주의이면서도 국왕은 귀족의 독점적 정권장악을 꺼린다고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면 전제왕권이 이완되어 척족정치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국왕이 지방의 혁신세력을 끌어들여 두 세력간에 충돌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사화이다.
둘째, 그는 조선후기를 이학지상주의시대라고 하였다. 17세기는 사화지상에서 리학지상으로 전환한 시기라고 한다. 주자의 리학은 군신의 의(리), 즉 충의 관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최고 절대의 권위는 실재하는 국왕이 아니라 가공적 ‘도’이므로 국왕은 의리에 합치하는 한 그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 송학적 ‘의리’‘리법’이야말로 17세기 붕당정치를 일관하는 씨족주의적 가족주의에 우선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의리’와 ‘학문’을 존중하는 시대였으므로 붕당정치시대에는 자기의 당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유능한 인물, 탁월한 학자를 뽑아 쓰려 하였고 이러한 개인능력의 존중 풍토는 그 사회를 활기에 넘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쟁이 심해지자 이 ‘붕당의 의리’는 무너지고 “가족주의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어 18세기 탕평시대의 편당, 19세기의 척신세도로 기울어져 갔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조선후기의 당쟁을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당쟁을 이기적 물욕적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의리라든가 학문이라든가 하는 것은 표면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비판하였다. 이것은 후대 인물들의 선입견 때문에 생긴 편견이라는 것이다.
넷째, 그는 19세기 세도정치시대에 있어서의 몰락양반과 민중의 동향을 당쟁사와 연결시켜 주목하였다. 당쟁이 고착되고 일당전제가 행해짐에 따라 당쟁의 열패자인 몰락양반들이 실지원국의 무리로 바뀌어 정감록천주교와 같은 현실국가사회를 부정하는 사상을 신봉하고 새로운 국가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노골적으로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치사에서 몰락양반토호민중 등의 신흥세력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당쟁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연구논문이 아닌 신문글이기는 하지만 일단 조선후기의 당쟁을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당쟁을 긍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부정적인 측면도 강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당쟁국이라 할 만하였다. 당쟁은 조선후기의 정치적 현실의 전부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쟁이 없는 나라는 없겠지만 우리처럼 지대지구지난(당의통략)한 나라는 없었다. 조정은 전장으로 화하여 그들이 힘쓰는 바는 공인, 살인이요, 환득환실하는 바 관직이니, 국리민복 같은 것은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파를 역적으로 몰아 그 공격은 격렬할수록 일파에 환영되었으며, 실각하였던 반대파가 재기하는 날엔 다시 보복에 여념이 없었으니, 무수한 비극은 반복하면서도 개오할 줄 몰랐던 것은 그 참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그는 이러한 당쟁이 일어나게 된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이익의 붕당론이 가장 정곡을 찌른 명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익은 붕당이 일어나는 까닭이 “관원소이응조다”, 즉 관직수는 적고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있다고 하였다.
김용덕 다음으로 당쟁을 긍정적으로 설명한 것은 이태진이다. 이태진은 안확과 석정수부의 당쟁에 대한 긍정적 견해를 받아들여 이를 일보 전진시켰다.
우선 그는 ‘당쟁’이란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쟁이란 용어는 일제시대에 폐원 탄이 “주의를 가지고 상립하는 공당이 아닌, 리해를 가지고 상호 배제하는 사당”이라고 처음으로 규정한 이래 그 대립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 왔기 때문에 그대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쟁’을 석정수부가 처음으로 사용했던 ‘붕당정치’라는 용어로 바꾸어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화당쟁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Ⅷ. 결론
권력투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있어 왔다. 그리고 권력투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육과 보복이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 단 세계의 정치사를 보면 무력을 가진 사람이 집권한 경우가 많다. 문사가 정치주체가 되는 문신정치는 요즈음의 몇 몇 선진국을 제외하면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문신정치, 문치주의는 세계의 유례가 드문 정치형태이다. 문치주의가 발달한 곳은 중국과 한국이 대표적이지만 중국의 경우는 정복왕조가 많아 황제의 전제권이 강하여 문신들의 독자적인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는 문신양반이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보다도 문치주의가 강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당쟁이 유례없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시한 복상문제 따위를 가지고 시비를 한다든지, 정변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든지 하는 것은 적당한 지적이 되지 못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복상문제가 우스꽝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문신정치의 특수한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시비거리였다. 여기서 이기면 정권을 차지할 수 있고 지면 정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쟁에서 희생된 사람수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10여 명이 죽거나 70-80여명이 귀양가는 정도지만 무사정권에서는 정권과 무관한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죽게 하였지 않는가? 당쟁의 희생자는 권력층 내부에 국한되지만 무사정권에서는 이와 무관한 사람들의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많이 죽인 지배자일수록 영웅 칭호를 부여받고 불과 몇몇의 권력자가 죽는 당쟁은 고질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면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임진병자란을 전후한 각각 200여 년간 승평을 누릴 수 있었던 문신정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배동수(1999), 16세기 후반 조선의 당쟁에 관한 일고
▷ 백유선(2007), 한 번만 읽으면 확잡히는 국사, 한언
▷ 이성무(2007), 조선시대 당쟁사1, 아름다운날
▷ 이덕일(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 이태진,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최완기(1994), 붕당정치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 한국사, 한길사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0.07.29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565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