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 청동기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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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역사와 문화 - 청동기유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부여 송국리 선사유적지 ◇
1. 부여 송국리 선사유적지 소개
2. 부여 송국리 유적의 마을과 집터
3. 부여 송국리 유적의 농경문화
4.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무덤
5. 청동기시대의 토기
6. 청동기시대의 석기
7. 청동기-동검문화의 발달과정

◇ 진주 남강유역 유적지 ◇
1. 진주 남강 유적지 소개
2. 구석기 시대의 남강 문화
3. 신석기 시대의 남강 문화
4. 청동기 시대의 남강 유적
5. 삼한 시대의 남강 유적
6. 삼국시대, 가야 시대의 남강
7. 남강 유적의 종합 평가

본문내용

갈고 곡식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만들던 생활도구들로서 표면이 매끌하여 갈았던 흔적이 뚜렷하다.
* 토지 공간 활용
어은 1지구에서는 자연제방과 구릉의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주거 공간, 경작 공간, 묘역 공간을 배치하고 있어 토지를 이용하는 선사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옥방 1지구에서는 집터 가까이에 지석묘 2기, 석관묘 3기가 발굴되었는데 이처럼 동일 공간에 취락과 묘가 분포하고 있는 예는 청동기시대 취락구조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대상유구(帶狀遺構)
주거지 가까이 환호와 비슷한 긴 구덩이를 파고 석기파편, 그릇파편 등 생활 쓰레기를 버린 수혈 대상유구가 대평리 어은 2지구, 옥방 2·3지구 등에서 발굴되었다. 이는 여러 군데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의 한 요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민무늬토기
남강 유적의 붉은 간 토기(홍도)는 돌널무덤과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외 심발형 적색 마연토기도 다수 출토되어 시대에 따라 껴묻거리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강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구순각목토기, 공열문토기 등이 발굴되고 있어 신석기 시대에 잇달아 청동기 문화가 이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야외노지(野外爐址)
조리를 하는 노지는 집터 안에 설치하는 경우보다 집터 바깥의 밭가 노천에서 다수 발굴되어 집 외부에서 공동취사를 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대평리 어은 2지구에서는 주거지 옆에 직경 1m 내외의 원형노지 7기가 발굴되었다.
5. 삼한 시대의 남강 유적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남강변에서 삼한시대의 집터 210기가 한 곳에서 발굴되었다. 집터는 신석기 2기, 청동기 35기, 삼한시대 160기, 미상 13기 등이며 그중 160기는 전시대의 집터를 침범하고 중복된 집터로 거대한 삼한시대의 읍락 유적으로서 우리 발굴사상 초유의 대형발굴이다. 신석기 시대 집터 위에 다시 청동기 시대의 집이 들어서 있다. 그 위에 다시 삼한 시대에 집을 짓는 중복된 층을 이룬 국내 최대의 유적으로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문화적 변천상을 규명할 수 있는 완벽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남부지방의 시대 편년 획정에도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신석기, 청동기, 삼한시대의 토기편과 석기류 2만 여점도 함께 출토되었다. 신석기 초기의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 삼한 시대의 연질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고 있으며, 일본 야요이식 토기도 더러 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이 유적이 복합유적으로서 신석기 문화에서 청동기 문화, 철기 문화로 이행되어 간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며 한국과 일본간의 교류관계를 밝혀주는 새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대평면 상촌리, 내촌리 일대에도 소남리 못지 않은 삼한시대의 거대한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강 유적은 삼한시대에 거대한 마을, 즉 읍락국가를 형성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6. 삼국시대, 가야 시대의 남강
가야는 삼한 중 변한이 모태가 되어 성립된 세력집단을 일컫는데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국들의 연맹형태로 머물러 있었다. 가야의 영역은 낙동강을 둘러싼 동·서안에 자리잡고 성장하였는데 금관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로 나눌 수 있다. 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은 풍부한 철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위지 동이전에 열거하고 있는 변한의 12국은 미리미동국(밀양), 고자미동국(고성), 구야국(김해), 안야국(함안), 독로국(거제)등이 있고, 이들 소국들은 나중에 가야소국으로 발전하였다.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경북 고령),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경북 함령), 성산가야(경북 성주), 소가야(고성), 비화가야(창녕), 고타가야(진주), 다라가야(합천) 등이 있으며 그밖에 대구, 경산, 초계, 의령, 거창, 밀양, 함안칠원, 사천, 울산, 거창, 함양, 창원 등지에도 읍락형태의 가야소국이 존재했던 것 같다.
오늘날 경남지역에 있는 창녕, 함안, 고성, 의령, 합천, 김해 등지의 가야의 고토(故土)에는 30여 개소의 고분군에 1,000여기(基)의 대형 고분이 남아 있다.
7. 남강 유적의 종합 평가
남강 유적은 수몰예정지구 111만평 중 그 1/20정도인 27개 지점만 2차에 걸쳐 발굴한 채 물속에 잠기게 된다. 고고학계의 맹렬한 반대와 경상남도의 추가발굴 주장에도 불구하고 남강댐 건설의 시급성, 발굴 소요 예산의 부족, 농민의 영농 재개 주장 등으로 중요한 곳만 발굴한 채 전반적인 발굴은 후세에 미루게 된다. 이 정도의 발굴로 남강 문화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발굴결과를 놓고 정리할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① 남강유적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 남단에 자리한 대륙문화의 종착지이다. 대륙인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동진 남하하여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이 바로 남강 유적이므로 각 시대의 문화가 그때마다 이곳에서 종합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남강 유적은 세계문화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② 남강 유적은 다양한 빗살무늬 토기편 등으로 볼 때 신석기 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지역이며, 연달아 청동기 시대, 삼한 시대로 이어진 중첩된 문화층으로 인하여 확인되는 각 시대의 변천과정을 밝혀주는 한국 고고학의 보고이다.
③ 남강 유적은 청동기인들이 대규모로 취락을 이루었던 지역으로서 공방지 유적, 환호 시설, 밭터 유적 등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의 분업화된 조직적 사회집단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④ 남강 유적의 소남리에서 집터 210기가 한꺼번에 발굴되고 상촌리, 내촌리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삼한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거대한 읍락국가가 형성됐던 곳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 12국에 대한 기사를 실물로 뒷받침 해주는 유적이다.
⑤ 남강 유적은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덕천강, 경호강 물로 인하여 어로와 농경이 항상 가능하였고, 그로 인해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단없이 사람이 살아온 선사시대의 중심지로써 이곳을 중심으로 남부지방의 고대 문화가 파생된 선사시대의 거점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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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8.19
  • 저작시기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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