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장유가 연구 레포트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작가 소개
2. 『일동장유가』
3. 『일동장유가』의 내용
4. 『일동장유가』의 의의
5. 『일동장유가』의 한계
Ⅲ. 결론

본문내용

대해서는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 속에 빠져 있었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는 일본을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왜’라고 일컬어 왔다. ‘일본’이라고 쓴 예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삼국유사에도 ‘일본’으로 나오는 것은 극히 희소하고 ‘왜’가 절대다수로 많이 나타나 있다. ‘왜’라는 표현은 고의적인 일본의 멸시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오직 가장 관습화된 호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원래 ‘왜’라는 호칭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표현방식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철저한 적개심에서 ‘왜놈’이 의식적으로 입에서 터져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임란이후의 문학작품에서는 ‘일본’이라는 기록은 거의 볼 수 없고 반드시 ‘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인겸에게는 ‘일본시’는 ‘왜시’이고, ‘일본유학자’는 ‘왜유’, ‘왜선비’였다. 그가 자주 쓴 ‘왜’라는 말에 ‘놈’이라는 말을 덧붙인 ‘왜놈’이라든지 ‘예놈’과 같은 말은 일본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표현임에 분명하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대장편인 일동장유가의 시작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몇 차례 ‘일본’이라는 말을 썼을 뿐,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머지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좋은 곳에서도 ‘왜놈’, ‘예놈(더러운놈)’ ‘개’ ‘돝(돼지)’ ‘추류(추한무리)’, 과 같은 표현을 썼다. 일본과 관련한 이런 비속한 표현이 작품 속에 시종일관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퇴석의 감정과 태도 등이 매우 강경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일본 특히 일본 위정자들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당시의 풍조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일동장유가』의 한계
김인겸은 임진란과 관련된 지역을 지날 때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극명하게 표현하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패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반면에 명나라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는 사대주의 사상에서 나온 결과로 작자가 조선선비의 전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인겸은 발전된 도회지의 모습에 대해서는 조선중국의 것과 비교하며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도회가 번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다만 발전된 일본 땅을 우리 땅으로 삼아 예의지국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 뿐이다. 이는 편협된 사고의 결과라 생각된다.
『일동장유가』가 갖는 큰 의미 중의 하나는 실학적인 관점에서 이용후생에 대해 배려를 했다는 점이다. 즉 일본의 농토의 비옥함, 고구마 재배, 수차와 물레방아 이용 등 선진적인 농업용 기계 , 발달된 교량, 직선화된 도로 등을 독자들에게 자세히 소개하고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문물을 소개하는 데 그쳤을 뿐 좀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전향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용후생면은 왜 우리 보다 앞서 있으며 경제적으로 발전했는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이 이미 배태되고 있던 당시에 일본의 위상과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 자세 등이 진지하게 성찰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Ⅲ. 결론
『일동장유가』는 김인겸이 일본통신사 조엄의 수행원(삼방서기)으로 일본에 갔다가 그 다음 해 돌아올 때까지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장편 기행문인 이 작품은 당시 우리 외교 사절단의 규모와, 한일 양국의 외교 방법, 그리고 당시 일본 풍속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평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후 아직도 가시지 않은 당시의 대왜(對倭) 감정에서 오는 미묘한 고민 같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외교사적인 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일동장유가』와 같은 성격의 가사 문학은 조선 초기의 송강 정철의 가사 중 『관동별곡』 기행가사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관동별곡』과 『일동장유가』는 구조나 작자 의식의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두 작품이 기행가사라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관동별곡』의 경우 작자 의식은 철저히 주자학적 이데올로기에 바탕하고 있다. 때문에 작자가 접하는 사물 역시 그러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새로이 환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일동장유가』의 작자는 대상을 자체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관심을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사용 자체의 서술과 작자의 느낌이 더불어 표현되므로 나열·병치의 서술 경향을 드러낸다. 이 같은 작자 의식의 차이는 형식에도 영향을 주어 『관동별곡』이 '서사 - 본사 - 결사'라는 정형화된 구조를 지니는 데 비해, 『일동장유가』는 그러한 정형성에 구애됨이 없이 여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열거해 나감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보인다. 이러한 장편화 경향은 조선 후기에 두드러진 산문 정신의 확대와 실학 정신의 영향, 그리고 작자층의 확대 및 견문의 다양화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짧고 정형화된 형식으로는 사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모두 담아 낼 수 없었다는데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홍순학의 『연행가』와 더불어 후기 기행가사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백미에 속한다. 그리고 정확한 노정, 일시, 날씨, 환경, 사건, 작가의 느낌을 과정 없이 묘사하였으며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곁들여 있어 기행 문학의 본령을 확립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일동장유가』는 일본사행기의 전통 속에 놓인다. 그러나 기존 사행기와는 달리 가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행기가 한문으로 된 교술 산문이라면 이 작품은 국문으로 된 교술율문이다. 즉 교술 산문으로만 되어 있던 사행문을 국문의 교술 율문으로 바꾼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이 작품으로 인하여 조선후기 가사는 그 외연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동장유가』 1763, 4년 당시의 일본 사정을 요모조모 국문으로 기록하여 국내에 알렸다는 점, 조선 후기 가사에 일본 체험을 부여하면서 그 외연을 확대시켰다는 점등 우리 문학사의 다양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0.10.20
  • 저작시기2010.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3582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