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최소국가론 비판
3. 근대의 재현인가?
4. 결론
2. 최소국가론 비판
3. 근대의 재현인가?
4. 결론
본문내용
가의 최소개입과 반드시 연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롤즈를 비판하면서, 분배를 위한 국가의 개입은 결국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을 침해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근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정의가 실현될 것이기에, 국가는 다만 야경(夜警)의 역할에 그치라는 것이 근대인들의 생각이었고, 국가가 정의실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자마자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혹사는 시작되었다. 하루 16시간을 일하고도 빵 한 조각 살 돈도 없는 노동자, 탄광에서 일해야 하는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과연 국가의 불간섭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노직이 원하는 사회상이 처참한 근대의 그것과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노직의 이론대로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근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이다. 사유재산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닮은꼴이 아닌가? 노직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의 노도를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닌가? 노직이 비판하는 롤즈의 견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롤즈는 사유재산의 형성과정에서, 그것이 사회적 협력의 산물임을 명확히 하였기에 재분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롤즈의 정의론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신자유주의 대신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근대인의 망상이 그러했듯이, 노직 역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초 위에서 시작하였기에 사유재산의 인정과 자유의 최대한 보장과 국가의 불간섭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인간은 결코 온전히 선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기적인 탐욕만을 위해 작동한다. 그런데도 노직은 정치철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의론까지 자유의 극대화만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4. 결론
보다 참된 정체(政體), 보다 정의로운 사회 건립을 위한 노력들은 각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여 점철되어 왔다. 유토피아를 향한 노직의 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국가에 의한 간섭이 관료제, 비효율, 제유의 제한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에 방점을 찍은 것은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득세하는 마당에 과연 노직의 정의론이 마땅한 것인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병폐라면, 철학자로서의 노직은 그것을 치료하는 의사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더욱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노직의 정치철학 역시 하나의 매력적인 이상향으로서는 적합할 수 있겠으나, 이것을 정초해가는 이론화 작업이 설득력 떨어짐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직의 최소국가, 공동체는 실현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야기할 문제점이 꽤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정의가 실현될 것이기에, 국가는 다만 야경(夜警)의 역할에 그치라는 것이 근대인들의 생각이었고, 국가가 정의실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자마자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혹사는 시작되었다. 하루 16시간을 일하고도 빵 한 조각 살 돈도 없는 노동자, 탄광에서 일해야 하는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과연 국가의 불간섭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노직이 원하는 사회상이 처참한 근대의 그것과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노직의 이론대로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근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이다. 사유재산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닮은꼴이 아닌가? 노직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의 노도를 더욱 부추긴 것은 아닌가? 노직이 비판하는 롤즈의 견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롤즈는 사유재산의 형성과정에서, 그것이 사회적 협력의 산물임을 명확히 하였기에 재분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롤즈의 정의론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신자유주의 대신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근대인의 망상이 그러했듯이, 노직 역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초 위에서 시작하였기에 사유재산의 인정과 자유의 최대한 보장과 국가의 불간섭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인간은 결코 온전히 선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은 이기적인 탐욕만을 위해 작동한다. 그런데도 노직은 정치철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의론까지 자유의 극대화만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4. 결론
보다 참된 정체(政體), 보다 정의로운 사회 건립을 위한 노력들은 각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여 점철되어 왔다. 유토피아를 향한 노직의 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국가에 의한 간섭이 관료제, 비효율, 제유의 제한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에 방점을 찍은 것은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득세하는 마당에 과연 노직의 정의론이 마땅한 것인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병폐라면, 철학자로서의 노직은 그것을 치료하는 의사 노릇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더욱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노직의 정치철학 역시 하나의 매력적인 이상향으로서는 적합할 수 있겠으나, 이것을 정초해가는 이론화 작업이 설득력 떨어짐을 부인하기 어렵다. 노직의 최소국가, 공동체는 실현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야기할 문제점이 꽤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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