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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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상인
1. 관상도고
1) 시전상인
2) 공인
2. 사상도고
1) 경강상인
2) 송상
3. 국경개시
1) 만상
2) 내상
4. 보부상

Ⅲ.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상조합 형태의 단체를 가진 상단에 소속된 상인을 보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체 개념으로 보부상의 생성시기는 조선초기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당시 조선왕조가 성립되어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행상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들 사이에 결사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가 각 고을에 임방(任房) 임방은 한자로 任房 또는 壬房이라고 쓰며, 행상의 침식제공과 장례식 등을 맡아서 처리하는 일종의 상인조합회관(guild hall)이다.
황명수 외『한국의 시장 상업사』신세계백화점 출판부(1992) p.62
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에 보부상단은 국가의 공인을 받는 상업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이라는 용어도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보부상은 이 두 상인의 복합명사이다. 보부상은 판매방식과 취급물종 등의 차이에 의해 보상과 부상 두 개의 상단(商團)으로 구분되었다. 보상은 비교적 값비싼 필묵, 금은동 제품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그래서 ‘봇짐장수’ 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부상은 나무그릇, 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상품으로 하여,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그래서 ‘등짐장수’라고도 한다. 보부상이 되는 경우는 농민 중 생활고로 토지에서 이탈된 자, 몰락한 양만, 수공업 종사자 등으로 양반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이래 신분제 빛 지주제의 모순에 의해 형성된 계층이다.
보부상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조선후기에 보부상이 크게 보급된 것은 향시(鄕市)망이 전국적으로 형성되어 보부상의 활동무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보부상은 상단을 결성함으로써 보상과 부상간의 거래 독점권을 유지하고 상호부조를 긴밀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가 보부상의 단결력과 조직망을 이용하여 비상시에 통신(通信)과 물자운반 등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보부상은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는 고유의 통신수단이 있어서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이 사발통문은 관계자의 이름을 삥 둘러서 적었기 때문에 주모자가 드러나지도 않는 장점이 있었다. 보부상의 조직은 시기와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상의 경우 1인의 대표 인 접장(接長)과 1명의 고문인 영위(嶺位)를 선출했으며 부상은 상무사의 중앙임원 35명, 지방 임원으로 반수(班首)와 부반수(副班首)가 각각 1명씩 있었다. 보부상은 이러한 전국적인 조직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보부상은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집단으로 더욱 정권과 유착하게 되었다.
보부상은 조선후기 상품유통의 공간확대에 기여하는데 19세기 중엽이래 지역별로 분업적으로 생산된 상품은 보부상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보상과 부상은 서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어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 보상이나 부상 한쪽만의 활동이 지배적인 경우 상대방 고유의 물종을 관할하는 경우도 있어서 때로는 판매영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부상은 영세성을 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상업자본으로 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상태에서 보부상 조직에 참여하여 조직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경우 자본의 축적이 가능했다. 이들은 시전상인으로 발전하거나 보부상에 의한 상회(商會)와 회사를 설립하거나 금전대출자로 성장했다.
Ⅲ. 맺음말
조선시대의 상인 집단을 분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특정상인 집단의 성격을 한가지로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상도고들의 경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겹쳐서 분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취급품목이나 매매대상이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송상의 경우 만상의 후시무역이나, 내상의 왜관무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청무역이나 대일본무역을 단순히 만상과 내상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울 주변의 사상의 경우도 이 보고서에는 대표적으로 경강상인만 다루고 있으나 서울 사대문안의 이현(梨峴: 동대문 시장의 전신)과 칠패(七牌: 남대문 시장의 전신)의 시장이나 서울 외곽의 송파(松坡), 누원점, 포천의 송우점(松隅店)등지에서 금난전권을 피해 서울 시전으로 들어오는 상품을 미리 매점하는 도고상인들의 활동도 대단히 활발했다. 이들의 상업활동은 조선전기의 시전상인 중심 역관 중심의 관무역을 무너뜨리고 개인에 의한 자유로운 상업활동과 개인자본의 축적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또한 보부상의 발전은 지방장시의 성행과 더불어 자본의 축적에 성공했으며 대표적인 사상도고인 송상과 함께 개항기 우리나라 최대의 민간자본으로 발전하여 외국자본의 침투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후기 사회는 이러한 상업적 변화와 함께 농업기술의 발달로 광작(廣作) 광작(廣作): 조선 후기에 농민들이 경작지를 늘려서 넓은 토지를 경작하려던 현상.
http://100.naver.com/100.php?id=702562
이 실시되고 경영형 부농이 등장하는가 하면 민간수공업의 발달 광산업의 성행과 같은 변화된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사회가 그 스스로 자본주의화 산업화로 나아갈 수 있는 맹아(萌芽)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정체된 사회는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마치 선심 쓰듯이 주장했던 식민지 근대화론도 사실이 아닌 왜곡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황명수 외『한국의 시전상업사』신세계백화점 출판부(1992)
오성『조선후기 상업사연구』한국연구회(2000)
유승주, 이칠성『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경인문화사(2002)
조재곤『보부상_ 근대격변기의 상인』서울대학교 출판부(2003)
김동철「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조선시대 서민생활 http://www.koreandb.net/Seomin/Default.htm
상도 임상옥 http://sang-do.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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