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강남 도래 후 승랑의 행적
Ⅲ. 승랑과 주옹의 생몰연대
Ⅳ. 승랑과 주옹의 사제 관계
Ⅴ. 재구성해 본 승랑의 생애
Ⅱ. 강남 도래 후 승랑의 행적
Ⅲ. 승랑과 주옹의 생몰연대
Ⅳ. 승랑과 주옹의 사제 관계
Ⅴ. 재구성해 본 승랑의 생애
본문내용
周씨이고 이름이 인 사람이 있었는데, 周弘正의 할아버지이다. 도랑법사와 함께 두루 돌아다니며 그 이치를 배웠는데 그로 인해 주옹은 큰 이치를 깨달아서 四宗論을 저술하였다. 그 때 그 문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승랑 스님은 ‘주옹이 저술한 사종론은 핵심을 잘 포착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하였다. … 주옹은 법사에게 초당사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여 무소득의 대승을 받아 배웠다. 배움을 마쳐서 깨달음을 얻자 ‘천하에 견줄 이가 없도다.’라고 말하였다. 삼론조사전집, p.519.
길장은 주옹이 승랑의 가르침을 받아 삼종론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사종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박상수의 지적과 같이 삼종론과 사종론이 같은 저술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혹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주옹이 사종론을 저술한 후 이에 대해 승랑이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하자 주옹이 이를 삼종론으로 개작했을 수도 있다. 길장의 설명에서 보듯이 삼종론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空에 대한 二宗의 이해는, 담제의 七宗論에서 소개하는 공에 대한 일곱 가지 이해 가운데 두 가지만을 발췌한 것이며, 三이든 四든 모두 空과 二諦에 대한 이해방식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 제명이 다르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승사론현의의 기사로 인해 길장은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왜곡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의심을 진행시켜 길장과 혜균 모두의 스승이었을 법랑이나 법랑의 스승 승전이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혜균이 소개하는 상기한 기사에 의거할 때, 삼종론의 출간을 주저하는 주옹에게 지림이 격려의 편지를 보낸 일화가 더욱 현실감 있게 살아난다. 위에서 보듯이, 주옹이 사종론을 저술한 후 승랑이 애초에는 그것을 칭찬했다가, 나중에는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했다고 하는데, 이런 주옹의 망설임이 지림의 편지에도 그대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 사이를 오가는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논문 작성이 이미 완성되었다더군요. 그대가 그렇듯이 저 역시 너무나 기쁩니다. 그런데 단월께서 상식과 다른 이론을 내세우게 될 때 공부하는 대중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고 들었습니다. 논문이 작성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출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듣자하니 우려하는 마음에 몽매한 자들을 깨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군요. … 比見往來者聞作論已成 隨喜充遍特非常重 又承檀越恐立異常時干犯學衆 製論雖成定不必出 聞之懼然不覺興臥… : 고승전, p.376b.
여기 인용한 지림의 편지에서 말하듯이 주옹이 ‘상식과 다른 이론을 내세우게 될 때 공부하는 대중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상기한 대승사론현의의 단편에서 보듯이 승랑이 사종론을 보고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애초의 사종론이 승랑의 조언을 받아 삼종론으로 재편집되어 출간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앞에서 어림짐작해 본 주옹와 승랑의 생존 연대에 근거할 때 주옹이 승랑보다 많아야 10세 정도 연상일 뿐이다. 따라서 10세 연하의 승랑이 주옹을 가르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주옹은 이름난 관리였으며 강남 도래 초기에 승랑은 주옹과 개인적 교류만 했을 뿐 공적인 생활이 거의 없었기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길장이 왜곡한 것도 아니고 그 이전의 법랑이나 승전이 왜곡하여 가르쳤던 것도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식민백성인 조선인의 선조’, ‘변방국인 고구려의 승려’였던 승랑을 격하시키기 위해 역사를 곡해했을 뿐이다.
5. 재구성해 본 승랑의 생애
그러면 필자의 이전 논문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Ⅰ의 내용과 위의 논의에 토대를 두고 승랑의 생애와 행적을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① 447~456년경: 고구려 요동에서 탄생
② 476년경: 고향을 떠나 황룡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불교를 공부한다. 특히 장안에서 삼론의 이치를 학습한다.
③ 479년경: 돈황의 담경 법사에게 가서 삼론을 배운 후 교화활동을 벌인다.
④ 480~484년경 초반: 강남으로 와서 담제의 칠종론을 독학한다.
⑤ 480~484년경 후반: 강남에서 주옹을 가르쳐 삼종론 저술케 한다.
⑥ 482~494년경: 경릉왕의 초청으로 섭산의 서하사 전신인 오산사에서 대승에 대해 설법한다.
⑦ 489년 이후: 서하사에 법도가 머물기 시작하자 법도의 서재를 드나들며 불전을 열람한다.
⑧ 490~494년: 주옹과 함께 절강성의 회계의 산음현으로 간다.
⑨ 494: 주옹이 사망하자 회계의 산음현에 은거한다.
⑩ 494~498년: 법사들의 초청으로 강소성의 섭산 지관사로 온다.
⑪ 494~512년: 지관사에서 삼론을 중심으로 삼아 대승을 강의하며 성실론사를 비판한다.
⑫ 512년: 양무제가 승랑의 소문을 듣고 10인의 승려를 승랑이 있는 지관사에 파견하여 배우게 한다.
⑬ 512년 이후: 섭산의 서하사가 중창되자 서하사로 옮겨 주석한다.
⑭ 522년~540년: 섭산 서하사에서 천화하다.
승랑이 강남에 온 시기는 480년대 전반기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494년경 주옹이 사망할 때까지 승랑과 주옹의 만남은 대부분 私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승랑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옹 사망 이후 승랑이 494~498년에 섭산 지관사로 가서 머물면서 성실론사를 비판하자 비로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형계 담연이 이 때를 승랑의 강남 도래 시기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승랑의 제자 승전의 전기가 속고승전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승랑과 마찬가지로 승전 역시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몇몇의 제자에게만 가르침을 전했던 수행승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승랑이 지핀 작은 진리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그 제자 승전에게 전해졌다가 손자 제자인 법랑의 시대가 되자 하나의 횃불로 일어나더니 증손 제자인 길장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비로소 동아시아의 불교계 전체를 밝히게 된다.
길장은 주옹이 승랑의 가르침을 받아 삼종론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사종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박상수의 지적과 같이 삼종론과 사종론이 같은 저술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혹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주옹이 사종론을 저술한 후 이에 대해 승랑이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하자 주옹이 이를 삼종론으로 개작했을 수도 있다. 길장의 설명에서 보듯이 삼종론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空에 대한 二宗의 이해는, 담제의 七宗論에서 소개하는 공에 대한 일곱 가지 이해 가운데 두 가지만을 발췌한 것이며, 三이든 四든 모두 空과 二諦에 대한 이해방식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 제명이 다르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승사론현의의 기사로 인해 길장은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왜곡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의심을 진행시켜 길장과 혜균 모두의 스승이었을 법랑이나 법랑의 스승 승전이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혜균이 소개하는 상기한 기사에 의거할 때, 삼종론의 출간을 주저하는 주옹에게 지림이 격려의 편지를 보낸 일화가 더욱 현실감 있게 살아난다. 위에서 보듯이, 주옹이 사종론을 저술한 후 승랑이 애초에는 그것을 칭찬했다가, 나중에는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했다고 하는데, 이런 주옹의 망설임이 지림의 편지에도 그대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 사이를 오가는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논문 작성이 이미 완성되었다더군요. 그대가 그렇듯이 저 역시 너무나 기쁩니다. 그런데 단월께서 상식과 다른 이론을 내세우게 될 때 공부하는 대중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고 들었습니다. 논문이 작성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출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듣자하니 우려하는 마음에 몽매한 자들을 깨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군요. … 比見往來者聞作論已成 隨喜充遍特非常重 又承檀越恐立異常時干犯學衆 製論雖成定不必出 聞之懼然不覺興臥… : 고승전, p.376b.
여기 인용한 지림의 편지에서 말하듯이 주옹이 ‘상식과 다른 이론을 내세우게 될 때 공부하는 대중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상기한 대승사론현의의 단편에서 보듯이 승랑이 사종론을 보고 ‘그 뜻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걱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애초의 사종론이 승랑의 조언을 받아 삼종론으로 재편집되어 출간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앞에서 어림짐작해 본 주옹와 승랑의 생존 연대에 근거할 때 주옹이 승랑보다 많아야 10세 정도 연상일 뿐이다. 따라서 10세 연하의 승랑이 주옹을 가르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주옹은 이름난 관리였으며 강남 도래 초기에 승랑은 주옹과 개인적 교류만 했을 뿐 공적인 생활이 거의 없었기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랑과 주옹의 사제관계를 길장이 왜곡한 것도 아니고 그 이전의 법랑이나 승전이 왜곡하여 가르쳤던 것도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식민백성인 조선인의 선조’, ‘변방국인 고구려의 승려’였던 승랑을 격하시키기 위해 역사를 곡해했을 뿐이다.
5. 재구성해 본 승랑의 생애
그러면 필자의 이전 논문 승랑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Ⅰ의 내용과 위의 논의에 토대를 두고 승랑의 생애와 행적을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① 447~456년경: 고구려 요동에서 탄생
② 476년경: 고향을 떠나 황룡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불교를 공부한다. 특히 장안에서 삼론의 이치를 학습한다.
③ 479년경: 돈황의 담경 법사에게 가서 삼론을 배운 후 교화활동을 벌인다.
④ 480~484년경 초반: 강남으로 와서 담제의 칠종론을 독학한다.
⑤ 480~484년경 후반: 강남에서 주옹을 가르쳐 삼종론 저술케 한다.
⑥ 482~494년경: 경릉왕의 초청으로 섭산의 서하사 전신인 오산사에서 대승에 대해 설법한다.
⑦ 489년 이후: 서하사에 법도가 머물기 시작하자 법도의 서재를 드나들며 불전을 열람한다.
⑧ 490~494년: 주옹과 함께 절강성의 회계의 산음현으로 간다.
⑨ 494: 주옹이 사망하자 회계의 산음현에 은거한다.
⑩ 494~498년: 법사들의 초청으로 강소성의 섭산 지관사로 온다.
⑪ 494~512년: 지관사에서 삼론을 중심으로 삼아 대승을 강의하며 성실론사를 비판한다.
⑫ 512년: 양무제가 승랑의 소문을 듣고 10인의 승려를 승랑이 있는 지관사에 파견하여 배우게 한다.
⑬ 512년 이후: 섭산의 서하사가 중창되자 서하사로 옮겨 주석한다.
⑭ 522년~540년: 섭산 서하사에서 천화하다.
승랑이 강남에 온 시기는 480년대 전반기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494년경 주옹이 사망할 때까지 승랑과 주옹의 만남은 대부분 私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승랑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옹 사망 이후 승랑이 494~498년에 섭산 지관사로 가서 머물면서 성실론사를 비판하자 비로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형계 담연이 이 때를 승랑의 강남 도래 시기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승랑의 제자 승전의 전기가 속고승전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승랑과 마찬가지로 승전 역시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몇몇의 제자에게만 가르침을 전했던 수행승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승랑이 지핀 작은 진리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그 제자 승전에게 전해졌다가 손자 제자인 법랑의 시대가 되자 하나의 횃불로 일어나더니 증손 제자인 길장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비로소 동아시아의 불교계 전체를 밝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