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이슬람의 정의
Ⅱ. 이슬람의 경제관
Ⅲ. 이슬람의 원리주의
Ⅳ. 이슬람의 법
Ⅴ. 이슬람의 일부다처제
Ⅵ. 이슬람의 재이슬람화
Ⅶ. 인도의 이슬람화 사례
참고문헌
Ⅱ. 이슬람의 경제관
Ⅲ. 이슬람의 원리주의
Ⅳ. 이슬람의 법
Ⅴ. 이슬람의 일부다처제
Ⅵ. 이슬람의 재이슬람화
Ⅶ. 인도의 이슬람화 사례
참고문헌
본문내용
으로 내려와 신드 지방에 이슬람의 정권을 세우고 수 세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국소적인 일부분 일 뿐, 인도 전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서 인도가 이슬람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이런 사실은 다시 3세기가 지나 10세기부터는 인도의 서북쪽에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10세기 후반 동칼리프라고 부르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이슬람왕조는 이란계 부이(부와이)왕조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칼리프는 이름만 지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이런 혼란기에 서아시아로 진출한 투르크인들의 군사적인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들 투르크인들이 옆에 있는 거대한 땅 인도를 그냥 두지는 않았겠지요.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당시 주요 상품이었던 노예를 얻기 위해 수없이 인도를 침범했다.
인도 약탈의 막을 올린 것은 가즈니왕조, 9세기 후반 아무(Amu)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란 동북부에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걸쳐 이란계 이슬람왕조가 나타나 부하라(부카라)와 사마르칸트 등 도시들이 동서교역으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이 왕조의 창시자가 귀족 사만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만왕조(Samanids / 874~999)라고 한다. 이 사만왕조에서 관리로 있던 투르크계의 노예출신 알프티긴(Alptigin)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지금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남서 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가즈니에서 독립을 선언(962), 수도 이름을 붙여 가즈니 왕조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가즈니 왕조에서 인도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가즈나왕조(Ghaznavid dynasty / 962~1186)라고도 부르는 이 왕조의 7대왕 마흐무드(Mahmud /998 ~ 1030)는 스스로를 높여 술탄(Sultan : 이슬람국가의 정치 최고 지배자)이라고 칭하고, 보물과 노예를 얻기 위해 전후 17차례나 인도를 침공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북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있는 프라티하라 왕조의 수도 카나우지(Kannauj)의 약탈과, 그리고 인도 서남부의 구자라트 주 카티아와르반도의 해안도시 솜나트에 대한 약탈, 카나우지를 약탈하기 위해, 1018년 10월 가즈니를 떠난 마흐무드는 도중에 힌두교의 성지 마투라(Mathura) 사원을 불사르고, 1019년 1월 목적지 카나우지에 도착, 카나우지의 라지푸트족의 왕은 일곱 겹으로 둘러싼 견고한 성벽을 두고도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 마흐무드는 힘들이지 않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유유히 가즈니로 돌아갔다.
다음 약탈의 목표는 구자라트주에 있는 힌두교 성지 솜나트, 당시 인도에서는 링가(liuga)라고 부르는 남근(男根) 숭배 신앙으로 들떠 있었는데, 여음(女陰)을 본뜬 접시 모양의 대 위에 남근이 여음을 꿰뚫는 해괴망측한 신상을 만들고, 이를 시바신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신자들은 꽃을 바치고 기름(乳脂肪)을 부으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솜나트사원, 인도 지도를 놓고 보면, 삼각형의 인도반도 서쪽 해안지대의 구자라트주, 즉 카티아와르반도에 있는 파탄이란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 보통 지도에는 명칭조차 보이지 않지만, 이 파탄 즉 솜나트가 시바신전의 성지였다고 한다. 사원에는 길이 3 미터가 되는 남근 형상의 괴상한 신체(神體) 링가를 모셔 놓고, 매일 1천명의 브라만이 제사를 올리고, 3천명의 이발사가 사원을 찾는 순례자를 위해서 이발을 해 주었으며(신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손발과 머리를 깨끗이 하여야 함), 350 명의 무녀(巫女)들이 미친 듯이 링가 주위를 춤추면서 돌아 다녔고, 다시 이들 무녀들은 이곳으로부터 750킬로미터나 떨어진 성스러운 갠지스 강으로부터 직접 날라 온 물로 매일 신체를 닦았다고 한다.
제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브라만들은 주위의 1만이 넘는 고을로부터 기부라는 이름으로 거둔 지세(地稅)로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이들과 무녀들 간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꼬리를 이었으며, 사원은 호화롭고 장려한 만큼, 보물로 가득 찼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보물 창고를 약탈자들이 그냥 보고 넘어 갈 리가 없다. 이슬람교도라면 누구나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 유일신 사상으로 세뇌(洗腦)된 그들 앞에 펼쳐지는 이런 광경들을 너무나 우습게보았고, 또한 이런 무지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사명감까지 불러 넣어 거침없이 사원과 신상을 파괴하고 보물은 약탈되었다.
무하마드가 솜나트 원정길에 오른 것은 1023년 12월 중순, 이듬해 3월에 솜나트에 도착한 이 침략자들은 종횡무진 살육과 파괴를 저지르고, 브라만들이 눈물로 호소한 것도 듣지 않고, 힌두 사원의 거대한 신체 링가를 산산이 부순 후, 종교적 주술적 간절한 발원으로 신체 안에 넣어둔 수많은 보물을 챙기고,... 신체의 일부를 가즈니 까지 가지고 가서 궁전과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문 앞에 깔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여 승자로서의 위세를 과시 하였다고 한다. 이런 약탈 전쟁 과정에서 브라만이나 왕후 귀족에게 짓눌려 지냈던 농민들이 이교도, 혹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싸움에 나섰다는 기록은 한 건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며, 이렇게 해서 가즈니 왕조의 인도 약탈은 병사의 휴식과 정보의 판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면서, 점차 그 빈도를 높였고, 북인도의 지배계급 라지푸트족은 크고 작은 봉건왕국으로 사분오열, 인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즈니왕조 때 까지는 이슬람교도를 자칭한 투르크 이슬람의 인도 진출의 목적은 약탈, 따라서 약탈 후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갔으나 그 후 인도에 들어온 투르크인들은 아예 인도에 머물면서 왕조를 세우고 인도 지배에 나섰고 이래서 인도는 이슬람화가 이루어 졌다.
참고문헌
* 김동문, 이슬람의 두 얼굴, 서울 : 예영, 2001
* 버나드 루이스 역, 김호동 옮김, 이슬람문명사, 이론과 실천, 1994
* 이희수·이원삼 외, 이슬람, 청아출판사, 2001
* 이원삼, 이슬람법사상, 아카넷, 2001
* 전재옥, 무슬림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서울 : 이슬람 연구소, 1995
* 최영길, 16억 이슬람인의 역사와 문화, 서울 : 송산, 1996
그러나 이것은 극히 국소적인 일부분 일 뿐, 인도 전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서 인도가 이슬람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이런 사실은 다시 3세기가 지나 10세기부터는 인도의 서북쪽에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10세기 후반 동칼리프라고 부르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이슬람왕조는 이란계 부이(부와이)왕조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칼리프는 이름만 지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이런 혼란기에 서아시아로 진출한 투르크인들의 군사적인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들 투르크인들이 옆에 있는 거대한 땅 인도를 그냥 두지는 않았겠지요.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당시 주요 상품이었던 노예를 얻기 위해 수없이 인도를 침범했다.
인도 약탈의 막을 올린 것은 가즈니왕조, 9세기 후반 아무(Amu)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란 동북부에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걸쳐 이란계 이슬람왕조가 나타나 부하라(부카라)와 사마르칸트 등 도시들이 동서교역으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이 왕조의 창시자가 귀족 사만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만왕조(Samanids / 874~999)라고 한다. 이 사만왕조에서 관리로 있던 투르크계의 노예출신 알프티긴(Alptigin)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지금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남서 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가즈니에서 독립을 선언(962), 수도 이름을 붙여 가즈니 왕조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 가즈니 왕조에서 인도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가즈나왕조(Ghaznavid dynasty / 962~1186)라고도 부르는 이 왕조의 7대왕 마흐무드(Mahmud /998 ~ 1030)는 스스로를 높여 술탄(Sultan : 이슬람국가의 정치 최고 지배자)이라고 칭하고, 보물과 노예를 얻기 위해 전후 17차례나 인도를 침공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북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있는 프라티하라 왕조의 수도 카나우지(Kannauj)의 약탈과, 그리고 인도 서남부의 구자라트 주 카티아와르반도의 해안도시 솜나트에 대한 약탈, 카나우지를 약탈하기 위해, 1018년 10월 가즈니를 떠난 마흐무드는 도중에 힌두교의 성지 마투라(Mathura) 사원을 불사르고, 1019년 1월 목적지 카나우지에 도착, 카나우지의 라지푸트족의 왕은 일곱 겹으로 둘러싼 견고한 성벽을 두고도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 마흐무드는 힘들이지 않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유유히 가즈니로 돌아갔다.
다음 약탈의 목표는 구자라트주에 있는 힌두교 성지 솜나트, 당시 인도에서는 링가(liuga)라고 부르는 남근(男根) 숭배 신앙으로 들떠 있었는데, 여음(女陰)을 본뜬 접시 모양의 대 위에 남근이 여음을 꿰뚫는 해괴망측한 신상을 만들고, 이를 시바신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신자들은 꽃을 바치고 기름(乳脂肪)을 부으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솜나트사원, 인도 지도를 놓고 보면, 삼각형의 인도반도 서쪽 해안지대의 구자라트주, 즉 카티아와르반도에 있는 파탄이란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 보통 지도에는 명칭조차 보이지 않지만, 이 파탄 즉 솜나트가 시바신전의 성지였다고 한다. 사원에는 길이 3 미터가 되는 남근 형상의 괴상한 신체(神體) 링가를 모셔 놓고, 매일 1천명의 브라만이 제사를 올리고, 3천명의 이발사가 사원을 찾는 순례자를 위해서 이발을 해 주었으며(신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손발과 머리를 깨끗이 하여야 함), 350 명의 무녀(巫女)들이 미친 듯이 링가 주위를 춤추면서 돌아 다녔고, 다시 이들 무녀들은 이곳으로부터 750킬로미터나 떨어진 성스러운 갠지스 강으로부터 직접 날라 온 물로 매일 신체를 닦았다고 한다.
제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브라만들은 주위의 1만이 넘는 고을로부터 기부라는 이름으로 거둔 지세(地稅)로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이들과 무녀들 간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꼬리를 이었으며, 사원은 호화롭고 장려한 만큼, 보물로 가득 찼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보물 창고를 약탈자들이 그냥 보고 넘어 갈 리가 없다. 이슬람교도라면 누구나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 유일신 사상으로 세뇌(洗腦)된 그들 앞에 펼쳐지는 이런 광경들을 너무나 우습게보았고, 또한 이런 무지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사명감까지 불러 넣어 거침없이 사원과 신상을 파괴하고 보물은 약탈되었다.
무하마드가 솜나트 원정길에 오른 것은 1023년 12월 중순, 이듬해 3월에 솜나트에 도착한 이 침략자들은 종횡무진 살육과 파괴를 저지르고, 브라만들이 눈물로 호소한 것도 듣지 않고, 힌두 사원의 거대한 신체 링가를 산산이 부순 후, 종교적 주술적 간절한 발원으로 신체 안에 넣어둔 수많은 보물을 챙기고,... 신체의 일부를 가즈니 까지 가지고 가서 궁전과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문 앞에 깔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여 승자로서의 위세를 과시 하였다고 한다. 이런 약탈 전쟁 과정에서 브라만이나 왕후 귀족에게 짓눌려 지냈던 농민들이 이교도, 혹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싸움에 나섰다는 기록은 한 건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며, 이렇게 해서 가즈니 왕조의 인도 약탈은 병사의 휴식과 정보의 판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면서, 점차 그 빈도를 높였고, 북인도의 지배계급 라지푸트족은 크고 작은 봉건왕국으로 사분오열, 인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즈니왕조 때 까지는 이슬람교도를 자칭한 투르크 이슬람의 인도 진출의 목적은 약탈, 따라서 약탈 후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갔으나 그 후 인도에 들어온 투르크인들은 아예 인도에 머물면서 왕조를 세우고 인도 지배에 나섰고 이래서 인도는 이슬람화가 이루어 졌다.
참고문헌
* 김동문, 이슬람의 두 얼굴, 서울 : 예영, 2001
* 버나드 루이스 역, 김호동 옮김, 이슬람문명사, 이론과 실천, 1994
* 이희수·이원삼 외, 이슬람, 청아출판사, 2001
* 이원삼, 이슬람법사상, 아카넷, 2001
* 전재옥, 무슬림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서울 : 이슬람 연구소, 1995
* 최영길, 16억 이슬람인의 역사와 문화, 서울 : 송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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