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감독소개
2.주연배우
철학적 해설:
1.플라토닉
2.운명공동체
3쇼펜하우어
4)니체
5.왜 인간은 사랑하는가?
7. 의문점
2.주연배우
철학적 해설:
1.플라토닉
2.운명공동체
3쇼펜하우어
4)니체
5.왜 인간은 사랑하는가?
7. 의문점
본문내용
이 맞물려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쳇바퀴 속에서 쉼 없이 고독과 사랑을 반복해가며 산다.
고독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는 이상, 사랑은 방심할 때마다 우리를 만나러 올 것이다.
7. 의문점
▶휴머니즘의 반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두 주인공을 생각해 보라. 체념이 아니라 확신에 따른 것이라면 벤의 자살은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세라의 창녀 활동(그 일이 정말 그녀의 취미라고 가정할 때)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녀는 여러 번 자신의 인생에 만족한다고 말했고 또 고객들에게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느낀다. 외부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그런 생각을 자기 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 속의 여러 장면에서는 이런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카메라 밖에 있는 치료사에게 그녀의 창녀 활동이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쉽게 유도해준 그룹 섹스를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공연 예술에 참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은 주리가 라스베가스에서 그녀를 추적하는 장면인데, 관객은 창녀 생활의 어려움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라가 “나쁜 때는 언제나 있는 거예요. 하지만 내 인생은 좋았어요. 내가 원하는 그대로 되었어요.”라고 말한 바로 다음에, 주리가 돈을 작게 가지고 온다고 그녀를 협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외부 관객이 그녀를 가리켜 자기 기만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가 정말로 가치 있다고 그녀가 판단하는 것(또는 그녀가 정말로 가치 있다는 판단할 법한 것)을 그녀보다 잘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주관적 의미의 요점을 놓친 것이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세라야말로 세라가 가치 있어 하는 것의 최종 결정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관객, ‘점잖은’ 사회, 전통적 도덕 등이 결정권자는 아닌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 점은 확인했다.
“실제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 가능하다. 그 결과 인간은 그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의지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한다.”
세라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의미있다고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세라의 입장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주관적 의미를 찾으면 된다는 입장을 타당한 관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의미 없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자살
벤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왜 이 길을 선택했는가? 빨리 끝내 버린다는 점에서 술 마셔서 죽는 것보다는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또 세라 같은 착한 이웃에게 방해받을 염려도 없다. 이런 여러 단점을 감안할 때 술 마셔서 죽는 것과 같은 선택은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벤의 자살 방식과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하는 방식에는 차이점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의도적으로 술을 마셔 죽는 행위는 상당한 업적이다. 인내력, 지구력, 신체적 불쾌감을 견디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술 마셔 죽는 것은 상당히 자부심을 느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벤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파괴라는 목표 상태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가 자신의 파괴를 당성하기 위해 밀어붙이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자살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알게 된다. 그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의 정신 상태가 지나친 음주로 피폐해지면서도(예전 생활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간다. 세라가 왜 그런 식으로 자살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가 알고 잇는 것이라고는 술 마셔서 죽어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목표뿐이다. 그는 자신의 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춘다. 벤은 세라가 알코올 중독에 한 치료를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것을 그의 마지막 고통을 가로막는 장애로 여긴다. 하지만 그는 세라를 떠나보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는 그날 밤 카지노에서 한 창녀를 만나 집으로 데려온다. 그는 그렇게 하면 세라의 방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당성하기 위한 굳은 의지로 어떤 것이든지 누구든지 희생시킨다.
둘째, 술 마셔서 천천히 죽겠다는 벤의 선택은 운명에 대한 조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알코올 중독이 그가 가진 문제의 시발점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어려운 상활을 역전시켜 자신의 목적 곧, 자신의 죽음에 이용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영웅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인생이 레몬을 내밀면 그것으로 레몬수를 만들라.’는 극단적인 낙관론이 아니다. 벤은 레몬수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그가 맞는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그의 욕망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가 그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벤은 정말로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바꾸는 일인가? 만약 우리가 돌에게 의식과 감각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날아가는 돌은 자신의 낙하지점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벤의 ‘선택’은 어쩌면 이 날아가는 돌과 같다. 그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은 그를 이 길로 밀어 넣었다. 그는 무기력하여 묵묵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낙하지점은 그가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벤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벤은 자살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찾는가? 이 자살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은 벤이 성취감을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목표들과는 다르다. 아니면 그의 자살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행동인가? 누가 “그런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가? 우리는 벤의 자살방법에서 영웅적인 어떤 모습을 보게 되지만, 벤으로서는 그것이 최소한의 저항을 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이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벤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 적극적으로 요망된다는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사례가 된다.
우리는 그러한 쳇바퀴 속에서 쉼 없이 고독과 사랑을 반복해가며 산다.
고독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는 이상, 사랑은 방심할 때마다 우리를 만나러 올 것이다.
7. 의문점
▶휴머니즘의 반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두 주인공을 생각해 보라. 체념이 아니라 확신에 따른 것이라면 벤의 자살은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세라의 창녀 활동(그 일이 정말 그녀의 취미라고 가정할 때)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녀는 여러 번 자신의 인생에 만족한다고 말했고 또 고객들에게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느낀다. 외부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그런 생각을 자기 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 속의 여러 장면에서는 이런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카메라 밖에 있는 치료사에게 그녀의 창녀 활동이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자신이 쉽게 유도해준 그룹 섹스를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공연 예술에 참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은 주리가 라스베가스에서 그녀를 추적하는 장면인데, 관객은 창녀 생활의 어려움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라가 “나쁜 때는 언제나 있는 거예요. 하지만 내 인생은 좋았어요. 내가 원하는 그대로 되었어요.”라고 말한 바로 다음에, 주리가 돈을 작게 가지고 온다고 그녀를 협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외부 관객이 그녀를 가리켜 자기 기만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가 정말로 가치 있다고 그녀가 판단하는 것(또는 그녀가 정말로 가치 있다는 판단할 법한 것)을 그녀보다 잘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주관적 의미의 요점을 놓친 것이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세라야말로 세라가 가치 있어 하는 것의 최종 결정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관객, ‘점잖은’ 사회, 전통적 도덕 등이 결정권자는 아닌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 점은 확인했다.
“실제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 가능하다. 그 결과 인간은 그의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의지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한다.”
세라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의미있다고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세라의 입장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주관적 의미를 찾으면 된다는 입장을 타당한 관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의미 없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자살
벤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왜 이 길을 선택했는가? 빨리 끝내 버린다는 점에서 술 마셔서 죽는 것보다는 머리에 총을 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또 세라 같은 착한 이웃에게 방해받을 염려도 없다. 이런 여러 단점을 감안할 때 술 마셔서 죽는 것과 같은 선택은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벤의 자살 방식과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하는 방식에는 차이점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의도적으로 술을 마셔 죽는 행위는 상당한 업적이다. 인내력, 지구력, 신체적 불쾌감을 견디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상태만 아니었더라면 술 마셔 죽는 것은 상당히 자부심을 느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벤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파괴라는 목표 상태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가 자신의 파괴를 당성하기 위해 밀어붙이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자살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알게 된다. 그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의 정신 상태가 지나친 음주로 피폐해지면서도(예전 생활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간다. 세라가 왜 그런 식으로 자살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가 알고 잇는 것이라고는 술 마셔서 죽어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목표뿐이다. 그는 자신의 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춘다. 벤은 세라가 알코올 중독에 한 치료를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것을 그의 마지막 고통을 가로막는 장애로 여긴다. 하지만 그는 세라를 떠나보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는 그날 밤 카지노에서 한 창녀를 만나 집으로 데려온다. 그는 그렇게 하면 세라의 방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당성하기 위한 굳은 의지로 어떤 것이든지 누구든지 희생시킨다.
둘째, 술 마셔서 천천히 죽겠다는 벤의 선택은 운명에 대한 조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알코올 중독이 그가 가진 문제의 시발점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어려운 상활을 역전시켜 자신의 목적 곧, 자신의 죽음에 이용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영웅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인생이 레몬을 내밀면 그것으로 레몬수를 만들라.’는 극단적인 낙관론이 아니다. 벤은 레몬수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그가 맞는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그의 욕망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가 그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벤은 정말로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바꾸는 일인가? 만약 우리가 돌에게 의식과 감각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날아가는 돌은 자신의 낙하지점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벤의 ‘선택’은 어쩌면 이 날아가는 돌과 같다. 그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은 그를 이 길로 밀어 넣었다. 그는 무기력하여 묵묵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낙하지점은 그가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벤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벤은 자살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찾는가? 이 자살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은 벤이 성취감을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목표들과는 다르다. 아니면 그의 자살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행동인가? 누가 “그런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가? 우리는 벤의 자살방법에서 영웅적인 어떤 모습을 보게 되지만, 벤으로서는 그것이 최소한의 저항을 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이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벤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 적극적으로 요망된다는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