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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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박정희의 죽음
3. 1212쿠데타
4. 서울의 봄
5. 서울역 회군
6. 결론

본문내용

미를 주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고려는 오히려 군이 거리에 편하게 나올 수 있는 여건만을 마련해주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전두환은 학생들의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총학생회장들은 서울역에서 물러난 다음날인 5월 22일까지 계엄해제를 요구했지만, 학생들이 집에 돌아간 마당에 총학생회장들의 요구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김대중, 김영삼은 5월 15일에 되어서야 겨우 만났다. 둘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등을 합의하고 주장했지만, 때는 너무나 늦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실질적인 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마지막 비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비명소리는 “북괴가 5월에 특수 8군단을 침투시켜 비정규전을 벌일 것”이라며 쿠데타의 빌미를 만들려는 전두환 군부의 사기행각과 맞아떨어지며 그나마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직 차려지지 않은 잔칫상인 대통령 선거에 대한 꿈은 헛되었다. 돌아온 것은 기나긴 연금과 가혹한 고문, 징역살이였다. 조금이라도 전두환 군부의 비위를 거슬린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들은 몸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없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던 서울에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쳤다. 한국은 다시 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된 유신시대로 되돌아갔다. 1981년 1월. 전두환은 자신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대한민국 제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6. 결론
‘서울의 봄’이란 말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결말조차도 소련의 군홧발에 짓긴 프라하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봄은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서 뼈아픈 실패다. 당시 민주화 정치권의 미래이던 김영삼, 김대중의 권력다툼이 그랬고 민중, 특히 학생들의 힘으로 민주화를 일구어 낼 가능성이 보였던 서울역에서의 심재철의 판단이 그랬다. 다시 멀어져 버린 민주화를 위해서 그 후로 다시 수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런 과거를 몰라서도, 미화시켜서도 안 된다.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과 학생들이 현대사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며 발표를 마친다.
※참 고 문 헌※
www.한국현대사.com, 김진국-정창현, 민연
이슈로 본 한국현대사, 이동현, 민연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갑제 , 조선일보사
www.naver.com

키워드

서울,   ,   역사,   박정희
  • 가격2,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1.10.07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6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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