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근세사회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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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진 사대부

2 요동 정벌과 4불가론

3 과진법의 시행

4 조선의 왕도 정치와 신문고(구언 제도)

5 수령의 덕목

6 훈구와 사림의 대립

7 사화의 발생

8 사림과 서원

9 향촌의 교화와 향약

10 붕당과 당쟁

11 조선 초의 대외 정책

12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13 가족 제도의 변화

14 조선의 형벌

15 지주 전호제의 성립

16 농장의 확대

17 연분 9등급과 전분 6등법의 실시

18 임꺽정과 16세기의 조선 사회

19 농업 기술의 발달(이앙법과 견종법)

20 조선 전기의 사서와 편찬 방법

21 윤리서의 간행 및 보급

22 자격루와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발전

23 조선의 풍수 지리설

본문내용

여진 방법으로, 사건을 유형별로 나누어 사건의 계기를 분명히 구분하려는 서술 체제이다. 인물 중심의 기전체, 연대 중심의 편년체보다 역사적 사건의 파악을 보다 확실하게 하려 하였다.
강목체(綱目體) 넓게 보면 편년체의 하나로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에서 비롯된 서술 방법이다. 도덕 사관에 입각하여 명분촹의리로 범례를 만들고 중요한 것은 강(綱)으로 큰 글자를 쓰고, 부수적인 것은 목(目)으로 작은 글자를 쓰는 체제이다.
윤리서의 간행 및 보급
[ 개 요 ] 국가의 지도 이념이 잘 구현되기 위해서는 지배층의 실천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국가에서 아무리 지도 이념을 강조한다고 해도 지배를 받는 일반 백성들이 이행하지 않으면 헛수고로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조선 정부도 건국 초기부터 이 점에 주안하여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윤리서를 간행하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 초에 먼저 간행된 윤리서는 효행록(孝行錄)이었다. 중앙 정부는 개국 초 정권 안정의 기반 확보 차원에서 유가의 실천 윤리 보급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 방편의 하나로 효행 사상을 널리 보급시킬 목적으로 효행록을 중간(重刊)하였다. 효행록은 원래 고려 말에 효행의 고취를 위해 권부(權溥)가 편찬한 책인데, 그의 손자인 권근(權近)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장마다 주해를 붙여 중간한 책이다. 세종이 삼강을 주제로 하는 책의 간행을 집현전에 명하면서, 내용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그림과 시(詩)와 찬(贊)으로 구성하게 한 것은, 삼강 행실도의 편찬 목적이 지식인이나 관료 계층보다는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유교 윤리로써 교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서자 삼강에 의한 교화와 더불어 이륜(二倫)에 대한 인식이 전대에 비해 중요시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륜은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삼강과 더불어 백성의 교화에 이륜을 중시한 이는 김안국이다. 그는 종족 내의 화목과 향인들 간의 화목을 위해서는 장유와 붕우의 이륜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하고, 삼강에 이륜을 보강한 오륜 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편찬하여 백성 교화에 힘쓰자고 하였다. 향촌 사회 내의 안정된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 윤리를 넘어 향당 윤리의 정착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그러므로 유교의 기본 규범인 가족 윤리와 함께 향당 윤리를 실현함으로써, 가족 관계 및 국가의 지배 체제 속에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예 질서를 촌락 사회에까지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자격루와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발전
[ 개 요 ] 조선 전기의 과학 기기의 발전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목표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풍흉과 밀접한 비와 바람 그리고 절기에 대한 이해가 정확해야만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과는 다른 기후 조건을 갖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맞추어 기상 관측을 하고자 측우기가 만들어졌고,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고자 풍기대를 설치하였으며, 우리 땅을 관측 지점으로 삼은 칠정산 내외편을 만들어 보다 정확한 절기를 알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일과에 있어서도 시간적 정밀성이 요구되어 각종 시계를 만들게 되는데, 이전의 물시계와는 달리 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인형이 나와 종을 때려 시보를 알려 주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서 장영실에 의해 제작된 것이 시보 장치인 자격루였다. 장영실은 세종의 명에 따라,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및 아라비아의 각종 시계 장치를 연구하여 자격루 제작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의 과학 수준을 끌어 올렸다. [ 관련 문제 89p. 3번 ]
조선의 풍수 지리설
[ 개 요 ] 풍수 지리설로 일국의 정책 내지 민심이 동요되었던 것은 결코 고려만이 아니었다. 그 잔영은 유학을 정교의 기본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 초에도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정종의 송도 환도, 태종의 한양 재천도에 이르기까지 고려 일대에 뒤지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풍수 지리설은 조선 왕조가 건국되고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고 마침내 한양에 정도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주목되었다. 하지만 한양 천도는 풍수 지리설의 영향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역사를 주도하는 유학자들의 현실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양의 산수에 대한 설명에서 풍수의 영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도읍으로서의 타당성을 논하는 기준으로 조운과 도리 등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었던 것이다. 한양 정도의 배경은 첫째, 개성은 고려 500여 년의 수도로서 주민의 대부분이 전 왕조에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태조의 정치적 기반은 극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고려 말의 빈번한 왜적의 침입으로 조운로가 자주 불통되었고 이 때 한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가 수송에 유리하였는데 한양은 수송로의 요지였다. 셋째, 한양은 개성에 비해 지역이 넓어 도시 계획에 유리하였다. 넷째, 교통의 요지였다. 이렇듯 조선 왕조 초기의 한양 정도를 고비로 풍수 지리설에 따른 천도 논의는 자취를 감추었고 더욱이 유교가 새로운 지도 이념이 된 조선 왕조에서는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 도참설의 경우 조선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 왕조의 출현 및 계룡산 정도를 예언한 정감록 같은 것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때로 정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조선 왕조는 도참설을 혹세 무민하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배척했던 만큼 국가의 운영 방향 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민간에서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는 말세적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대신 조선 후기에 와서는 묘자리 선정에 대한 것이 풍수 지리설의 주종을 이루었다. 그 결과 조선 시대에는 세력 있는 자가 남의 집안의 선산을 침해하여 묘지 쟁송이 자주 일어났고, 또 집안의 횡액을 산소의 탓으로 돌려 개장·이장하는 폐단도 일어나게 되었지만, 풍수 지리설은 사회 하층부까지 깊숙히 침투되어 생활의 일부를 이루었다. 실학자들은 지표상의 특정 장소만이 다른 곳에 비해 생기가 넘치며 그런 터를 차지한 자만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풍수의 허구성을 용납하지 않았다. 근대 개화기 계몽파들의 풍수설 비난은 더욱 혹독하여 독립 신문은 풍수설의 허무함과 폐단 낭비를 여러 차례 역설하고 폐지를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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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28
  • 저작시기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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