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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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고려·요 전쟁 직전의 국제정세
1) 중국의 정세 변화와 송·요의 각축양상
2) 거란족의 흥기와 세력 확장
3. 고려·요 전쟁
1) 고려·요 전쟁 발단 원인
2) 제 1차 고려·요 전쟁
3) 제 2차 고려·요 전쟁
4) 제 3차 고려·요 전쟁
4. 고려·요 전쟁 이후의 국제정세
5. 맺음말

본문내용

의 패권을 신흥세력인 여진족 여진족은 원래 고려와 요의 중간에 위치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그 생존을 유지하여 왔지만, 이 전쟁 이후에 민족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이 종식되고 난 뒤에 계속된 장기간의 평화로 고려가 서북계 및 동북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완화하자 여진족은 이를 틈 타 통일을 이룩하여 금 제국을 세우고, 요와 송을 제압한 후, 만주와 북중국 일대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의 금 제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또한 송은 건국 이래 연운 16주의 탈환을 두고 거란과 접전을 벌였으나 끝내 힘에서 밀려 전연의 맹을 맺은 후 거란에 많은 공물을 보내야 했다. 여·요 전쟁에서 실패한 이후 요는 대외 정복이 위축되면서 속국으로부터의 공물 유입이 한계에 다다랐고, 이에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송에 세공의 증액을 요구하였다. 송 인종 때 요가 세공 증액을 요구한 것은 서하를 방비하기 위한 군비와 함께 송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재정 압박은 신종 때 이른바 왕안석의 신법을 시도하는 배경이 되었지만 신법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 새로 흥기한 여진족의 금은 송과 연합하여 거란을 멸망시켰고, 이듬해에는 송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압박하여 사대의 예를 취하게 하였다. 이로써 10새기 요 제국이 누리던 동북아시아 패권은 11세기의 소강상태를 지나 12세기에 이르러 금에게 넘어갔다.
5. 맺음말
여·요 전쟁은 고려가 건국된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의 대외전쟁이었다. 또한 국력과 군사력 양면에서 월등한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요의 무렵 위협을 세 차례나 격퇴시킨 전쟁이었다. 전쟁 상황 속에서 요군의 군세에 압도된 고려 지도층 일각에서는 항복과 알지를 조건으로 요와의 평화교섭 논의를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고려는 국초 이래의 북진이념을 바탕으로 한 영토 불양보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요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여·요 전쟁전쟁이 종식된 후, 양국간에는 형식적인 군신관계가 성립되어 한동안 친선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요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요와의 평화적 관계를 수립한 뒤에도 경계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변경지역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여 요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내었다. 따라서 고려가 요와 타협한 것은 국익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요의 무력 위압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요 전쟁 이후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주변 민족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 지위 강화에 주력하였다. 고려인들은 오리혀 여·요 전쟁에서의 참화와 폐허를 딛고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제도와 체제를 개선함으로써 국가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여·요 전쟁의 영향으로 송·요 제국이 쇠퇴하고 신흥세력인 여진족이 급성장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정세는 송·요 제국을 차례로 멸망시킨 여진족의 금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키워드

고려,   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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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1.11.22
  • 저작시기2011.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1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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