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 시작, 마산과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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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혁명이 마산의 3·15의거를 기점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마산에 가 보면 3·15의거 탑이 시내를 관통하는 대로변에 떡하니 자리 잡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산에 살면 누구나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나또한 저 길을 수백, 수천 번을 오가면서도 제대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대학을 서울로, 그것도 국사학과로 오게 되었고 그나마도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4·19, 그리고 3·15에 약간이나마 신경 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올해, 4·19혁명 50주년으로 우리 학교 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게 되었고 50주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는지 평소 자주 가지 않던 박물관에 갔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둘러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또다시 발견한 마산의 3·15의거, 그리고 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고 4·19로 확대된 스토리.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이번 한국 현대사 수업의 과제물로 이것을 다뤄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3·15의거의 배경과 전개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의 자유당에 의해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국민을 철저히 기만한 부정선거였고 그 사실은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하면서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사실 50년 6·25 때 자신만 피난을 간 것에서부터 시작해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개헌을 거치면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자유당에서 이와 같은 부정행위를 실시하게 된 것인데 만일 당시 84세인 이승만이 죽을 경우 그 빈자리를 대체할 부통령 이기붕도 자유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당선시켜야 할 인사였다. 여하튼 자유당의 부정 선거를 알아챈 마산의 민주당 간부들은 3월 15일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부정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오전 10시 30분경 선거 포기를 선언하였으며 시위를 준비하여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간부들이 앞장을 서서 저녁 7시 30분경 천여 명의 마산 시민들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정전이 되었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분노하게 만들어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파출소장의 집 등을 파괴했다.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도 파괴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났었다.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4월 11일 아침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주열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의 모습으로 마산 만에 떠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마산 전경을 통해 살펴본 3·15의거의 전개과정
이제 당시 마산의 사정을 담아 둔 사진들을 살펴보면서 3·15 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마산 시민의 대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사진 6>을 보면 ‘트집마라! 건설이다!’는 문구가 확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조병옥의 급서 이후 ‘슬픔을 딛고 다시 싸움터로’ 라는 민주당의 구호에 대항한 것이라는데 그 설명이 확 와 닿지는 않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전 3대 대선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에 대항한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가 더 확실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사진 8>에서처럼 당시 부정선거를 위해 정당하게 투표된 것들은 버려지고 자유당원들이 임의대로 투표한 부정선거 용지를 개표에 썼던 것이다.
<사진 9>와 <사진 10>에서 나타나는 장소는 동일한 장소로 뒤쪽에 보이는 산으로 미루어 보아 <사진 1>에 나오는 의거 탑에서 멀지 않은 장소이다. 시위대는 지금의 의거 탑 자리를 지나 당시 개표가 되고 있던 마산 시청까지 시위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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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부터 시작돼 4월 11일 김주열 열사를 계기로 확산된 마산의 시위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이승만은 결국 26일 오후 1시 라디오를 통해 대통령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이기붕의 양자이던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를 총으로 쏴 죽이고는 자신도 자살하였다. 이로써 4·19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맺으며
정부는 올 해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3·15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 이로서 3·15의거가 국가 기념일로 인정되면서 4·19보다 이른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게 된 것이다.
사실 마산시민으로 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의 일원으로서도 결국 4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고장 마산(지금은 서울 시민이지만)의 뜻 깊은 날에 대한 첫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마침 올 해 4월 19일 60주년을 기념하여 학교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렇게 보고서까지 작성하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참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3·15나 4·19뿐만 아니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87년의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끊임없는 독재의 위협을 받아 왔다. 하지만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부르짖던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그 열매인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명박 정권의 파행적인 정국 운영과 6·2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난 특정 당의 국민에 대한 기만 등을 볼 때 아직도 우리나라의 민주화 수준은 더욱 끌어올릴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이럴수록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과거의 뜻있는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투지를 잊지 말고 항상 정권에 대한 경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

키워드

4.19,   마산,   3.15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1.12.08
  • 저작시기201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18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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