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3. 나무의 수사학 감상.
2-3 김행숙 시인의 <눈사람> 감상
과제 3-1 그의 흉터-유홍준 감상 및 분석
과제 4-2. 홀로코스트(배용제) 감상
과제 5-1. 창작시 감상.
1. <거지아이> 감상.
2. <독거감방> 감상.
3. <아무것도 아닌 난> 감상.
4. <욕(欲)> 감상.
5. <추락한 어릿광대의 작은 소망> 감상
2-3 김행숙 시인의 <눈사람> 감상
과제 3-1 그의 흉터-유홍준 감상 및 분석
과제 4-2. 홀로코스트(배용제) 감상
과제 5-1. 창작시 감상.
1. <거지아이> 감상.
2. <독거감방> 감상.
3. <아무것도 아닌 난> 감상.
4. <욕(欲)> 감상.
5. <추락한 어릿광대의 작은 소망> 감상
본문내용
밥그릇만 내밀 뿐이다. 대답하기 싫으니 밥이나 달라는 걸까.
사실 그게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죽었는지, 아니면 그들을 두고 어디로 갔는지, 하여간 그들 곁에 없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가 머리에 꽃 꽂고 다른 세상에 사는 양 춤추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그렇듯 무표정하게 세상을 보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세상에 산다 해도 이 세상에 미련이 있는 걸까. 밥은 아이가 얻는데 먹는 건 엄마가 먹고, 아이는 남은 것이나 훑어 먹는다. 해가 지려 하니 두 사람은 어디론가 떠난다. 어미는 여전히 춤추고, 아이가 그런 어미를 잡아끈다.
가을인데, 곧 추워질 텐데. 저 모자 과연 무사할지 걱정되는 광경이다. 여기에 더 어떤 감상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2. <독거감방> 감상.
세상 사는 게 괴로운 건,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괴롭게 살기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살아간다 말하면서, 세상에 있는 갖은 괴로움을 찾아 괴로워하며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게다. 그걸 깨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끊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래도 살거나. 둘다 공통점은 하나 있다.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무척이나 지긋지긋해진다는 것.
이 시의 화자도 어느 순간 그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같은 노래인지 어떤 작품 제목인지 하는 게 있다지만, 이 화자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세상 살아간다는 게 하늘 올려다볼 틈도 없이 바쁜 게 사람의 ‘정상적인’ 삶이 된지 꽤 오래되지 않았는가. 갑자기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한데, 하늘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광등 달린 천장에 가려졌다. 독거감방이라고 한다. 나가기 어렵다는 소리다. 죄를 지어 세상에 의해 감방에 갔건, 아니면 그 스스로 살다 보니 어느덧 자기가 자기를 가둬버리는 경지에 이르렀건, 그가 하늘을 보자는 생각을 하기 전의 그는 감방에 있었다는 사실도 인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나’가 지겨워질 밖에.
그런데, ‘나’를 지겨워하는 것도 결국은 ‘나’다. 끊지 않는 이들에겐 평생 지고 나가야 할 짐이다. ‘나’는 말이다.
3. <아무것도 아닌 난> 감상.
스님인가 보다. 스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 화자도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각할 겨를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까, 아니면 생각할 겨를을 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까. 그래서 이 시의 화자가 스님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는 이들에게 제공될 최상의 환경이란, 결국은 머리를 깎거나, 수단을 걸치거나 해야 얻을 수 있게 있는 세상이란 것이 서글픈 현실이라서 말이다.
사실, ‘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굉장히 슬프고, 또한 아픈 사실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또한 ‘나’니까.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이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신적인 매저키스트가 아닌 이상임에야.
그러나, 그런 고통도 얼마 가지는 않는다고 화자는 말한다. 결정의 기대라 한다. 결정(結晶), 본질이다.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진리이다. ‘나’ 또한 세상의 일부이니, 그 ‘나’를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말로 ‘먼지처럼 바스러’뜨림으로서 결정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진리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더 큰 깨달음, 더 큰 희열이 그 뒤에 찾아온다. 극기훈련 하면서 많이 듣던 소리다. 세상에서 흔히 듣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건, 세상을 넘어선 세상에도 그런 법칙은 존재한다는 증명인지도 모르겠다. 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라는 거 말이다.
4. <욕(欲)> 감상.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여주인공의 관점에서 보는 기분이 든다.
거리의 여인이다. 어른들을 모신다 하니 나이는 어린 듯 싶으나, 치욕만이 가득한 금고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철없을 나이는 지난 모양이다. 잘못된 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헤어나오지 못할 때, 그런 여인들을 가지고 돈을 버는 못된 이들의 눈에는 ‘장사 한참 잘될 때’로 보이고, 세상에서는 흔히 ‘한창 좋을 때’의 처녀인 것 같다.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말할 생각은 없다. ‘지지배가 지가 헤퍼서 어쩌고....’ 같은 무식한 소리를 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이 아직 세상을 잘 모를 때, 잠깐 세상에 틈을 보이긴 했었으리라. 되고 싶어서 되었겠는가. 세상의 욕(欲)이라 함은 그렇듯 무섭고, 또 무서운 것이다.
세상 몇 년 험하게 살다 보니, 이제 그런 욕(欲)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세상을 그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는 소리다. 자기 앞에 기다리는 미래를 잘 알고 있다. 겉만 화려하지 실속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일상이 지나고 또 지나다 보면 모든 것은 물거품 될 터이다. 나이 들고, 남자들의 눈으로 볼때 ‘보기 미워져서’, 그래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그 팔자는 뻔하다. ‘욕(欲)’에 가득찬 세상에 대해서 ‘욕(辱)’이나 하게 되겠지.
그래도 희망은 있다. 희박하지만. 기다리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자신에게라도 손을 내밀 사람을.
5. <추락한 어릿광대의 작은 소망> 감상
광대는 웃으면서 눈물을 감추는 족속이라고 한다. 슬픈 노릇이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서 웃어야 한다는 것은.
그라고 왜 내놓고 슬퍼하고 싶지 않을까.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아프면 울고, 괴로우면 울고, 울고 웃기를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건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분장 따위는 지워버리고, 가면을 쪼개고 세상에 나오라 한다. 나와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웃고 싶은 만큼만 웃으라는 것이다. 살얼음판처럼 얇아서 위태로운 인생이지만, 추락해서 깨어지면서까지도 내어놓고 눈물 흘리지 못하는 팔자보다는, 그래도 웃고 울기를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리 말하다 생각해보니, 울고 웃기를 마음대로 못하는 것은 광대나 우리나 매일반인데, 왜 우리는 광대를 가여워하는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든다.
사실 그게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죽었는지, 아니면 그들을 두고 어디로 갔는지, 하여간 그들 곁에 없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가 머리에 꽃 꽂고 다른 세상에 사는 양 춤추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그렇듯 무표정하게 세상을 보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세상에 산다 해도 이 세상에 미련이 있는 걸까. 밥은 아이가 얻는데 먹는 건 엄마가 먹고, 아이는 남은 것이나 훑어 먹는다. 해가 지려 하니 두 사람은 어디론가 떠난다. 어미는 여전히 춤추고, 아이가 그런 어미를 잡아끈다.
가을인데, 곧 추워질 텐데. 저 모자 과연 무사할지 걱정되는 광경이다. 여기에 더 어떤 감상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2. <독거감방> 감상.
세상 사는 게 괴로운 건,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괴롭게 살기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살아간다 말하면서, 세상에 있는 갖은 괴로움을 찾아 괴로워하며 사는 게 인간이라는 게다. 그걸 깨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끊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래도 살거나. 둘다 공통점은 하나 있다.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무척이나 지긋지긋해진다는 것.
이 시의 화자도 어느 순간 그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같은 노래인지 어떤 작품 제목인지 하는 게 있다지만, 이 화자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세상 살아간다는 게 하늘 올려다볼 틈도 없이 바쁜 게 사람의 ‘정상적인’ 삶이 된지 꽤 오래되지 않았는가. 갑자기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한데, 하늘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광등 달린 천장에 가려졌다. 독거감방이라고 한다. 나가기 어렵다는 소리다. 죄를 지어 세상에 의해 감방에 갔건, 아니면 그 스스로 살다 보니 어느덧 자기가 자기를 가둬버리는 경지에 이르렀건, 그가 하늘을 보자는 생각을 하기 전의 그는 감방에 있었다는 사실도 인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나’가 지겨워질 밖에.
그런데, ‘나’를 지겨워하는 것도 결국은 ‘나’다. 끊지 않는 이들에겐 평생 지고 나가야 할 짐이다. ‘나’는 말이다.
3. <아무것도 아닌 난> 감상.
스님인가 보다. 스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 화자도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세상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각할 겨를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까, 아니면 생각할 겨를을 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할까. 그래서 이 시의 화자가 스님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하려는 이들에게 제공될 최상의 환경이란, 결국은 머리를 깎거나, 수단을 걸치거나 해야 얻을 수 있게 있는 세상이란 것이 서글픈 현실이라서 말이다.
사실, ‘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굉장히 슬프고, 또한 아픈 사실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또한 ‘나’니까.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이 알고보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신적인 매저키스트가 아닌 이상임에야.
그러나, 그런 고통도 얼마 가지는 않는다고 화자는 말한다. 결정의 기대라 한다. 결정(結晶), 본질이다.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진리이다. ‘나’ 또한 세상의 일부이니, 그 ‘나’를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말로 ‘먼지처럼 바스러’뜨림으로서 결정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진리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더 큰 깨달음, 더 큰 희열이 그 뒤에 찾아온다. 극기훈련 하면서 많이 듣던 소리다. 세상에서 흔히 듣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건, 세상을 넘어선 세상에도 그런 법칙은 존재한다는 증명인지도 모르겠다. 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라는 거 말이다.
4. <욕(欲)> 감상.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여주인공의 관점에서 보는 기분이 든다.
거리의 여인이다. 어른들을 모신다 하니 나이는 어린 듯 싶으나, 치욕만이 가득한 금고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철없을 나이는 지난 모양이다. 잘못된 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헤어나오지 못할 때, 그런 여인들을 가지고 돈을 버는 못된 이들의 눈에는 ‘장사 한참 잘될 때’로 보이고, 세상에서는 흔히 ‘한창 좋을 때’의 처녀인 것 같다.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말할 생각은 없다. ‘지지배가 지가 헤퍼서 어쩌고....’ 같은 무식한 소리를 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이 아직 세상을 잘 모를 때, 잠깐 세상에 틈을 보이긴 했었으리라. 되고 싶어서 되었겠는가. 세상의 욕(欲)이라 함은 그렇듯 무섭고, 또 무서운 것이다.
세상 몇 년 험하게 살다 보니, 이제 그런 욕(欲)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세상을 그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는 소리다. 자기 앞에 기다리는 미래를 잘 알고 있다. 겉만 화려하지 실속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일상이 지나고 또 지나다 보면 모든 것은 물거품 될 터이다. 나이 들고, 남자들의 눈으로 볼때 ‘보기 미워져서’, 그래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그 팔자는 뻔하다. ‘욕(欲)’에 가득찬 세상에 대해서 ‘욕(辱)’이나 하게 되겠지.
그래도 희망은 있다. 희박하지만. 기다리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자신에게라도 손을 내밀 사람을.
5. <추락한 어릿광대의 작은 소망> 감상
광대는 웃으면서 눈물을 감추는 족속이라고 한다. 슬픈 노릇이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서 웃어야 한다는 것은.
그라고 왜 내놓고 슬퍼하고 싶지 않을까.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아프면 울고, 괴로우면 울고, 울고 웃기를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건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분장 따위는 지워버리고, 가면을 쪼개고 세상에 나오라 한다. 나와서,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웃고 싶은 만큼만 웃으라는 것이다. 살얼음판처럼 얇아서 위태로운 인생이지만, 추락해서 깨어지면서까지도 내어놓고 눈물 흘리지 못하는 팔자보다는, 그래도 웃고 울기를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리 말하다 생각해보니, 울고 웃기를 마음대로 못하는 것은 광대나 우리나 매일반인데, 왜 우리는 광대를 가여워하는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