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로 본 북한의 향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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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북한의 세습과정
1) 김정은의 세습과정·····················
2) 후계자의 요건
3) 후계자의 유일한 영도체제 확립···

3. 현실주의 시각에서 국제흐름 파악
1) 중국의 대북정책··················
2) 북한의 대남정책··················
① 공세적 대남노선··············
② 대남유화노선·················
③ 종합················
3) 한국의 대북정책·············
①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비교
②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의 북한의 대남정책 비교
4. 결론·······························

※참고자료
※참고문헌

본문내용

게 김영숙이라는 여성과 결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성혜림은 불면증, 신경쇠약증, 불안발작 등의 병을 얻어 모스크바로 치료차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2002년 5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정남은 90년대 말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으로부터 경제를 배우며 후계자 수업을 받는 듯 했다. 후계자 수업을 받을 당시 김정남 주변에는 15명 이상의 호위병과 당 조직부 간부들이 늘 함께 다녔다. 김정일은 김정남에게 특별히 학자들을 붙여줘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했다.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주변 간부들의 김정남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아 김정일도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마음을 굳히는 단계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생전에 “김정일의 세 아들 중에 김정남이 가장 우수하고 그가 집권하면 북한은 더 오래갈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김정남은 특유의 배짱과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과 사귈 수 있었고 특히 호기심이 많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북한 전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북한의 현실을 현장에서 소상히 지켜봤다고 한다. 한 군인 출신 탈북자는 “김정남이 1992년경에 김정일과 함께 한 군부대를 방문할 때에는 인민군 대장복을 입고 나타났다”며 “당시 많은 군 간부들은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주장했다.
그런 김정남의 후계자 지위가 흔들리게 된 것은 김정일에게 대든 게 화근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절대 권력을 쥐게 된 김정일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김정일에게 대드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정남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 김정남은 전국을 다니면서 북한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는 주변 간부들과 함께 다니면서 “조선은 개혁·개방하지 않으면 큰일난다” “아버지의 정책은 잘못됐다”고 거침없이 떠들고 다녔다.
이런 김정남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김정일은 1999년 봄 김정남의 최측근인 ‘태권도 전당’ 관장인 박억련을 체포해 보위부에 연행했다. 당시 김정남은 당 조직부 등 공식적인 측근그룹 외에 사(私)조직도 갖고 있었는데 박억련이 사실상 김정남의 사조직 총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억련은 김정남을 위해 소위 기쁨조를 대동한 파티까지 열었고 이 모든 것은 김정일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고 한다. 김정일은 아들이 기쁨조 파티를 하는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지만 개혁·개방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것에 대해서는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박억련은 보위부에 연행된 후 한 달도 안돼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고 다른 측근들도 차례로 보위부에 소환돼 모두 다시 나오지 못했다. 사실상 박억련 사건은 김정남의 종말을 예고한 사건이었고 김정일은 이때 김정남을 후계자에서 제외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남이 2001년 4월 일본에 불법 입국했다가 체포돼 북한에 송환된 사건은 그가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생명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 이후 김정남은 아버지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성혜림의 이혼경력, 그녀에 대한 김일성의 불인정, 김정일과 그녀의 비교적 짧은 동거기간 때문에 북한에서 그녀를 '국모'로 내세우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일성 사후 고영희를 국모로 내세우는 개인숭배가 진행된 사실은 김정남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축소시키는 요인들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성혜림의 조카 이일남과 언니 성혜랑 등이 남한과 외국으로 망명한 사실도 김정남의 후계자 지명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북한 내 고위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은 그래도 김정일에게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해외비자금 관리와 외화벌이를 하겠다고 나섰고 김정일은 중국과 마카오에서의 비자금 관리와 외화벌이를 김정남에게 맡겼다고 한다. 김정남은 일본과 중국을 잇는 무역거래를 독점하면서 막대한 외화를 벌었고 마카오의 김정일 비자금도 일부 자신이 관리하면서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을 들락거리며 중국 내 ‘태자당’과도 깊은 연계를 맺고 있어 중국의 보이지 않는 힘이 김정남을 보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국 정부는 3대 세습에 대해 겉으로는 침묵하면서 인정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이 북한을 감싸고 돌수록 국제적 망신을 자초할 뿐 아니라 글로벌 리더십도 상실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결국 북한 정권을 변화시켜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압력 카드로 김정남을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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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한국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d20101003145950n5745&ng=101 검색일 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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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장, 「김정일 시대 북한의 후계 문제-징후와 후계 구도」, 한국정치학회보 39집 2호, pp345-36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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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남북한 평화공존과 대북정책」,통일 연구원
「통일연구」,연세대 통일연구원
우승지,「2.13합의 이후 북한의 핵전략과 대남전략에 대한 분석」2007년
유동렬,「김대중정부 출범이후 북한의 대남전략 평가」2002년

키워드

북한,   김정은,   김정일,   외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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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8.30
  • 저작시기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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