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의 화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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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의 화합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계유명 아미타 삼존 불비상 (국보 106호)
1. 발견시 정황
2. 형식상의 특이점
3. 아미타불 명문에 관하여
4. 불비상과 절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
5. 아미타불의 조성 목적
6. 결론

Ⅱ.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

Ⅲ. 정혜, 정효공주 묘지
1. 발견 경위
2. 묘지
3. 정혜, 정효공주 묘지
4.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묻혔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공주의 남편들에 주목하면, 우선 정혜공주가 묻힌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들이 매장된 곳이다. 아마도 그 남편은 발해 건국 집단에 속하는 핵심 지배층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반면 정효공주가 묻힌 중경은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이다. 발해 전반기에는 자주 수도를 옮겼는데 (동모산 →중경→상경→동경) 이는 지방 토착 세력을 복속시키려는 지방 지배의 일환이었다. 육정산이 아닌 중경에 묻힌 것으로 보아 정효공주의 남편은 이곳에 일정한 연고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왕이 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중경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그 지역 출신 중 지배층에 편입된 세력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2) 상장기간이 다른 이유
정혜공주는 3년상, 정효공주는 1년상을 치렀다. 고구려나 백제가 3년상을 치렀던 것, 또 정혜공주의 무덤 양식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석실 봉토분(모줄임천장)이라는 점에서 이는 고구려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 1년상을 치른 정효공주의 경우, 무덤이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때 발해가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데 따른 변화로 보인다.
정혜공주묘 실측도 정효공주 무덤 측면 예상도
3) 문왕의 연호
발해에서는 왕이 죽으면 시호를 올리고 다음 왕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다. 737년 즉위한 문왕은 처음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5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지배체제 확립에 힘쓴 문왕은 발해의 국세를 크게 일으키는 것을 국정지표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혜공주 묘지명에는 공주가 보력 4년에 죽어 3년 상을 치르고 보력 7년에 장사지냈다고 나와 있다. 즉 문왕은 처음에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보력으로 고쳐 사용했던 것이다. 보력은 왕이 새해에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달력을 말한다. 달력을 나누어 주는 것은 왕의 고유권한으로 그 자체가 왕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보력이라는 연호에는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문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효공주 묘지명에 다시 대흥 연호가 등장하고 있다. 본래 과거 연호를 다시 쓰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정국 주도 세력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774년에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고치면서 왕권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귀족 세력의 반발이 있었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문왕 말기에 다시 대흥으로 연호를 고친 것은 국왕중심의 권력 강화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4. 역사적 의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매지간인 두 공주의 묘지명에 따르면 정혜공주는 아버지인 문왕이 한창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죽었고, 정효공주는 귀족세력의 반발에 왕권이 약화될 때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묘지명에 별다른 의도 없이 삽입된 몇 구절이 문왕대의 체제 정비와 그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함으로써 베일에 싸인 발해사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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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2.09.16
  • 저작시기2012.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7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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