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택한 청년노동자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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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죽음을 선택한 청년노동자 전태일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 왜 전태일인가
Ⅱ. 사회가 만들어낸 전태일, 전태일이 만든 사회 파장
1. 전태일을 통해 볼 수 있는 1960~1970 경제―사회구조
1) 경제적 측면으로 집중한 당시 사회 모습
2) 시대 속에서 자란 전태일
2. 평화시장과 전태일
1) 평화시장의 실상과 전태일
2) 전태일의 사상
3. 전태일의 분신과 사회적 파장
Ⅲ. 나오며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

본문내용

회유하고,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는 일이 반복되고 끝내는 ‘너희 들이 하는 일은 모두 헛수고’ 라고 하며 형사들을 보내 감시하여 그들이 데모를 꾸미는 일 모두를 수포로 만들자, 전태일은 ‘화형식’을 거행하자고 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으로만 생각했다는데 친우 김영문 씨. MBC 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전태일과 그 이후’ 편에서.
전태일은 자신을 희생하는 화형식이었다.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데모를 할 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전태일은 친구에게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전날 ‘ 누구 한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 번쩍 들게 하자’ 라고 말한 걸 들은 기억이 있는 친구는 그런 줄 알고 가만히 대었을 뿐인데, 이미 옷 속에 스펀지를 대고 석유를 뿌리고 왔던 그의 몸 EBS 의 지식E 채널 ‘전태일’편 참고.
은 활활 타올랐다. 그 와중에도 하는 소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였다.
이 한 노동자의 절규와 같은 마지막 외침은 사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큰일은 아니었다. 먼 나라의 어떤 배우의 신변잡기와 같은 것보다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분신이라는 충격적인 방법을 통해 세상에 그 존재와 그 부조리함을 알렸다. 그가 죽은 지 사흘째인 16일에 서울 대 생들이 모여 전태일 시체를 인수하여 추도식을 갖았고,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모순된 경제 질서와 극단화된 계층화 등 개발독재를 고발하는 ‘국민권리 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당시 지식인이자 엘리트였던 대학생들을 동요하게 했다. 정치 민주화만 알았을 뿐, 바로 근처에서 다락방 같은 곳에서 허리 한번 못 피고 14시간동안 노동하는 여공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의 표출이었다.
전태일의 투쟁은 현실에 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었던 모든 민중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빈사 상태에 있던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한국노총아래서 무기력한 어용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을 불렀다. 전태일의 분신에 따른 학생·노동자·종교인 등의 궐기는 노동문제를 사회여론의 제1차적 관심사로 등장시켰다. 종전에 노동문제라면 사실보도조차 기피하던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에서도 노동문제에 대해 보도하고 특집기사를 싣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도 코미디나 다름없었던 면이, 전태일의 분신에 대해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다가 뒤늦게 많은 집단이 궐기하자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는 등 노동운동을 운운했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12월 15일 기사 참고.
전태일의 죽음과 그 다음해인 1971년 선거를 전후하여 한때 활기를 띠던 노동운동은 1971년 10월 계엄령이 발동되고 12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암흑 저편으로 잠재워진다.
Ⅲ. 나오며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
이토록 지금의 내가, 또한 앞으로의 사람들이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통해 노동운동의 터닝-포인트와 같은 선구자로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있다. 전태일을 논하면서 전태일을 기억하게 하는 사람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는 조영래다. 전태일과 같이 현실의 치열함 속에서도 사람을 사랑하길 놓지 않았던 그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는데,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전태일의 일을 접하게 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확산하기 위해 평전을 썼었다. 그 평전은 1983년에 발간되었지만, 조영래의 사망 후 1990년이 되어서야 그의 저서임이 밝혀졌다. 여기서도 당시 ‘무서운 사회’를 엿보게 한다.
전태일의 수기와 그에 관한 평전을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전태일이 매우 감수성 있고 난관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정신이 있었다는 것에 집중하기 이전에 그러한 ‘건수’를 제공한 사회에 대한 조명이 필수였음이다. 전태일은 왜 하필 그 때 그러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장렬히 산화했는가. 그가 고민한 그것과 같이, 왜 노동자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일해도 ‘거지 갖은 것들’이 되어 높은 빌딩과 잘 정리된 도로를 등지고 작은 천막집을 전전해야 했는지, 개인이 게을러서라고 꾸짖는 정부 슬로건과 달리 그토록 손에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바로 사회 구조적으로 원천 봉쇄된 ‘지랄용천’이었음을 느꼈을 때 가슴에 차가운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그 시대를 전문적으로 살펴 볼 능력은 부족하였으나, 1950년대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진 경제격차와 1960년대 성장제일주의 기조에 막힌 빈부의 격차와 구조적으로 이뤄지는 가난의 세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한 부조리를 부르짖은 용감하고도 따뜻한, 그리하여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리는 것이 전태일이었고, 그는 밑바닥의 사람이되 밑바닥의 사람들의 선택마저 부끄러워하며 비판하기 보단 사랑으로 부정하여 기득권과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분신한 이후 화상에 도움이 되는 주사 2대를 못 맞아 후속 조치 없이 서서히 화기와 함께 말라죽어가며 ‘배가고프다’고 남긴 것에서 변하지 않은 현실과 앞으로도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시련을 암시한 것만 같다. 그 시련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참고
-논문-
윤병선.「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우리 농업의 미래」.한국생명학연구원.2005.
이원보.「유신독재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과 성장-1070년대 노동운동」.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
-서적-
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2005.
전태일.『전태일 전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1988.
(조영래)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돌베개.1983.
조영래.『전태일 평전』.돌베개.1996.
-미디어(신문, 방송)-
경향신문 1970년 10월 7일 전면
조선일보 1970년 12월 15일 사회면 논평참고.
EBS 의 지식E 채널 ‘전태일’편 참고.
MBC 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전태일과 그 이후’ 편 참고.
-인터넷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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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7
  • 저작시기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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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67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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