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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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_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1
Ⅱ본론
1.백제의 건국 --------------------------1

2한성시대 -----------------------------1

3웅진시대 -----------------------------4

4사비시대 -----------------------------7

결론

본문내용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내우외환을 심화시켜 안으로는 왕권강화를 어렵게 만들뿐 아니라 왕실의 존엄까지 흔들리게 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외부세력 특히, 신라와의 관계가 매우 복잡해 졌다. 그 결과, 위덕왕이 즉위한 이후 전쟁에 반대했던 온건귀족들의 대표적 귀족인 대성팔족이 성립되었다. 중국의 『수서』 동이전에는 사(沙) 연(燕) 협(協) 해(解) 진(眞) 목(木) 국(國) 백( )씨가 대성팔족으로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대표적인 신구귀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세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인 좌평회의의 위상이 높아 졌다. 6좌평제로 불리는 것으로 사비시대 전기의 5좌평제를 확대, 개편한 최고귀족회의체였다. 위덕왕의 뒤를 잇는 혜왕이나 법왕의 단명으로 더욱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무왕은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강화를 위해 신라에 대한 공격 단행, 익산 천도를 위한 왕궁과 제석사 건설, 거대한 미륵사 창건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무왕은 일찍이 3년에 4만이라는 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삼국사기』권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김부식
王怒令 佐平解 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있음으로 보아 이는 성왕의 관산성 패전이후 야기되었던 귀족세력의 증대로 왕권이 약화되었다고만은 볼수 없다. 어느정도의 내적인 안정과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 졌으리라 보여진다. 『백제 무왕의 익산경영』유원재 1996
그러나, 무왕이 사망하고 익산 천도가 실현되지 못하면서 그 계획은 좌절되고 이후, 의자왕은 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유력귀족 40여명을 추방하는 등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고구려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여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강화된 왕권으로 국력을 모은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 등 40여 개 성을 빼앗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이같은 승리로 인해 의자왕은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결과 탐락과 황음, 궁중 내부의 분열과 부패는 백제 사회를 약화시켰고, 빈번한 전쟁에서 오는 국력의 피폐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됨으로서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대외관계
사비천도 후 중흥기에 접어들게된 백제는 또한, 그 힘을 바탕으로 신라-가야군과 동맹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나 신라가 고구려와 연결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나,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는 관계로 시작하였으나, 신라-고구려와 백제가 대결하는 양상으로 끝나게 된다. 위덕왕때에는 중국 남조 일변도의 대중국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이런 외교노선을 지양하고 북조에도 빈번한 사신의 파견을 시도한다. 이는 다름아닌 아직 상존하고 있는 고구려 남진을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조와 연결함으로써 그의 위협을 해소하려함이었다. 그러나 이와중에도 수는 중국을 통일하고 백제는 바로 수와의 관계를 긴밀히 한다. 『삼국사기』권제27 백제본기 제5 무왕, 김부식
八年 春三月 遣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8년(607) 봄 3월에 한솔 연문진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고 또 좌평 왕효린을 보내 조 공하고 아울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7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의 시기로, 중국에서 당나라가 강성하고 고구려가 중국과 강력히 대립하였다. 이 때에 백제가 친고구려 외교로 기울자 신라는 당나라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남북진영과 신라-당나라로 연결되는 동서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대립 상황에서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삼국유사』권제1 왕력(王曆)제1, 일연 庚申國除
결론
이와같은 백제사의 흐름 속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왕성한 문화 창조력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지리적 특징상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뻣은 해안선이 있어서 활발한 대외교역을 할 수 있는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가 농업을 바탕으로한 경제력이나 대외교역면에서 삼국 중 선두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은 백제문화를 꽃피우는데 있어서 매우 큰 자산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백제사의 흐름은 수도를 중심으로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는 서해와 남동해의 리아시스식 해안을 접하고 있어서 해상을 통한 대외교역을 일찍부터 전개하여 대외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교역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입하여 백제의 고유한 것으로 재창출하는 문화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문화가 오늘날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백제인의 문화가 차원이 높고 그야말로 풍류와 멋을 제대로 알고 있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화려한 문화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이후에도 그들의 문화 창달에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백제에 대하여 지금의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반성하고, 백제와 백제인에 대한 연구를 재평가 해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참고 문헌
김부식,『삼국사기』백제본기 이재호 옮김, 솔, 1998
일연,『삼국유사』노중국 옮김, 계명대학교출판부, 1999
이연수,『남사』이맥전 백제
국사편찬위원회,「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한국사론』1978.3
p4~64
박현숙,『백제 이야기』, 대한교과서 1999
이남석,「공주산성내 백제 추정왕궁지」,『백제문화』, 공주대학교, 연구논문 2001 p1~18
유원재,「백제웅진시대의 지방통치와 귀족세력」,『백제문화』공주대학교, 연 구논문 1997 p3~17
강맹산,「웅진시대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백제문화』공주대학교, 연구논 문 1997
나종우,「백제사상에있어서익산의위치」,공주대학교,연구논문1997 p101~115
유원재,「백제무왕의 익산경영」,『백제문화』공주대학교, 연구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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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8
  • 저작시기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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