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없다. 크래독은 설교형태와 중심메시지의 부합성의 고민했다. 그는 성경적인 설교란 형식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형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복음 선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평가
내러티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말꾼이 되어야 한다. 연역적 방법처럼 주제를 던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기에 군더더기가 붙을 수가 없다.
또한 이야기식 본문이 아닌 곳은 본인 스스로 이야기의 플롯을 형성하고 나가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도 필요하다. 플롯을 형성하고 말을 잘 이끌어 가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실 구전으로 이어졌던 방식이고 그것이 활자의 발전과 함께 갇혀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본인의 설교를 녹화하여 본적이 있다. 아무리 원고설교라고 하지만 원고에 시선을 다 빼앗겨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이야기다보니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면 되는데 철저한 이야기꾼이 아닌 이상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연역적 설교와는 다르게 회중과 함께 설교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적인 청중보다는 함께 말씀에 몰입해서 듣는 성도는 하늘과 땅차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청중을 배려하는 듯한 설교방식은 청중으로 하여금 큰 위로의 음성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 반면 여전히 과거 설교들만을 인정하는 부류도 있다. 대부분 3대지 연역적 설교를 택하고 이미 오래된 성도들은 3대지 설교만이 권위있는 참 설교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스스로 다양한 방식에서 나오는 흥미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크래독이 말한 것처럼 귀납적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동참하고 들려지게 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들 스스로가 제한하며 딱딱하고 지루한 설교를 선택하는 것은 더 넓은 식견이 없고 포용할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일 수밖에 없다. 한국강단에 다양한 설교형식이 있고 흥미를 주며 청중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한함으로 마치 절뚝박이 인생처럼 되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크래독이 말하는 성경해석과 해석에서 설교방법은 참으로 많은 부분 회중을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의 입장에서 처음 말씀을 읽고 느낀점을 기록했다가 다시 석의와 주석을 통해 말씀의 본 의미를 파악한 후 다시 본문과 멀어져 회중의 입장에서 말씀을 정리하여 접근한다는 것은 회중의 대한 배려가 매우 많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단점이 있는데 이 움직임에 대하여 많은 설교자들이 굳어진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또한 성경과 씨름하며 동시에 형식과 씨름해야 하는 다소 번거러움이 있다. 또한 중심메시지를 다시 풀어서 전개해야 하는 생소한 작업도 큰 숙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크래독이 말한것처럼 어떤 특정한 형태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형식은 이야기의 대한 논리성을 뒷받침해주고 더욱 청중으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수 있음에는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자명한 진리이다.
평가
내러티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말꾼이 되어야 한다. 연역적 방법처럼 주제를 던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기에 군더더기가 붙을 수가 없다.
또한 이야기식 본문이 아닌 곳은 본인 스스로 이야기의 플롯을 형성하고 나가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도 필요하다. 플롯을 형성하고 말을 잘 이끌어 가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실 구전으로 이어졌던 방식이고 그것이 활자의 발전과 함께 갇혀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본인의 설교를 녹화하여 본적이 있다. 아무리 원고설교라고 하지만 원고에 시선을 다 빼앗겨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이야기다보니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면 되는데 철저한 이야기꾼이 아닌 이상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연역적 설교와는 다르게 회중과 함께 설교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적인 청중보다는 함께 말씀에 몰입해서 듣는 성도는 하늘과 땅차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청중을 배려하는 듯한 설교방식은 청중으로 하여금 큰 위로의 음성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 반면 여전히 과거 설교들만을 인정하는 부류도 있다. 대부분 3대지 연역적 설교를 택하고 이미 오래된 성도들은 3대지 설교만이 권위있는 참 설교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스스로 다양한 방식에서 나오는 흥미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크래독이 말한 것처럼 귀납적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동참하고 들려지게 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들 스스로가 제한하며 딱딱하고 지루한 설교를 선택하는 것은 더 넓은 식견이 없고 포용할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일 수밖에 없다. 한국강단에 다양한 설교형식이 있고 흥미를 주며 청중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한함으로 마치 절뚝박이 인생처럼 되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크래독이 말하는 성경해석과 해석에서 설교방법은 참으로 많은 부분 회중을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의 입장에서 처음 말씀을 읽고 느낀점을 기록했다가 다시 석의와 주석을 통해 말씀의 본 의미를 파악한 후 다시 본문과 멀어져 회중의 입장에서 말씀을 정리하여 접근한다는 것은 회중의 대한 배려가 매우 많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단점이 있는데 이 움직임에 대하여 많은 설교자들이 굳어진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또한 성경과 씨름하며 동시에 형식과 씨름해야 하는 다소 번거러움이 있다. 또한 중심메시지를 다시 풀어서 전개해야 하는 생소한 작업도 큰 숙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크래독이 말한것처럼 어떤 특정한 형태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형식은 이야기의 대한 논리성을 뒷받침해주고 더욱 청중으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수 있음에는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자명한 진리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