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중세교회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인격으로 종단을 이끌어 갔다고 한다면, 도미니크는 훈련의 대가로서 종단을 엄격한 규범으로써 이끌었다. 프란체스코는 사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필생의 사업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겸손의 표상으로서 존경을 받는다면, 도미니크는 이단을 물리치는 망치와 같았다.
① 프란체스코파
㈎ 성프란체스코
성프란체스코의 본명은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도네로서 118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아나서 1226년에 죽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보면 창피를 느꼈다. 이렇게 해서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하였다.
프란체스코파는 창설자 프란체스코의 지시를 끝까지 따르려는 순수파 혹은 엄격파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된 추기경 우골리노가 세운 규범과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완화된 온건파로 나누었다.
㈏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의 본래 이름은 지오반니 디피단자였다. 그는 아시시의 성자를 따르는 데 있어서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는 위기상황에서 중도 노선를 취함으로써 위대한 신학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교회 행정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교단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나벤투라의 신학적 업적은 그의[롬바르드의 문장론 주석]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피조된 우주가 창조자에게 이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관조에 있다.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관조하는 데 있다.
② 도미니크파
㈎ 도미니크파의 역사적 발전
도미니크 혹은 도밍고는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1170년에 태어나서 볼로냐에서 1121년에 죽었다. 학문과 영혼구원이 도미니크 교단의 주된 강조점이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프랑스의 왕가와 인척관계에 있는 아퀴노의 랜둘프 백작의 막내아들로서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세의 보편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보편은 "스스로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즉 보편은 사물 안에 구체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존재유비의 타당성을 말한다. 토마스는 존재론적인 신 증명방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부정할 수 없는 운동을 사실로 삼고 출발한다. 두 번째는 인과율이다. 세 번째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다. 네 번째 방법은 존재들이 완성되는 각종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다섯 번째 방법은 우주의 질서로부터 출발하는 전통적인 목적론적 논증이다.
이상과 같은 토마스의 하나님 존재증명 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단순한 생득적인 인지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점에서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토마스는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1567년 교황 피우스 5세는 '교회의 완전한 박사'라는 칭호를 '천사박사님'께 하사하였다.
제 11 장.회교도에 대한 공격과 유럽교회의 몰락
십자군 전쟁과 스페인의 회교도에 대한 공격은 중세 유럽의 불만의 입김을 아시아로 배출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세워 보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술책이었다.
1. 십자군전쟁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의 필요성은 일찍이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제기되어 있었다. 1096년 8월 15일 승천기념일에 출발한 제1차 십자군 원정단은 우르반 2세가 지명한 푸이의 주교인 아드헤마르가 총사령관으로서 이끌었다.
제2차 십자군운동은 제1차 십자군들의 외곽 거점이었던 에뎃사가 터키족에게 재탈환 당하자, 십자군을 지원하자는 운동이 클레르보의 버나드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제2차 십자군 200,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곳곳에서 패배를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재탈환 당하였다.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2세 아우구스투스가 제3차 십자군을 동원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출군을 명령하였다. 제5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왕이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서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관할하고 동시에 성지로 잇는 도로들을 양도받음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끌었으나 대실패에 그쳤으며, 제 8차 십자군도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7차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튜니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2. 스페인 재정복
이때로부터 스페인은 대양탐험과 신대륙 발견, 그리고 무적함대를 이끌고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위성국가로 만들었으며, 특히 교황청을 종이 호랑이로 만들었다.
3. 회교도들에 대한 공격의 결과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의 기독교는 샬레만뉴의 부흥 이래로 내적인 타락을 겪었으며, 일반인들의 불만이 쌓이자 이를 밖으로 터뜨린 해결책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는데, 십자군전쟁으로 인해서 회교도들에 대한 전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십자군운동의 힘은 하나님이 원하셨다. 이러한 기사단들은 유럽의 기사전통을 수립해 주었으며, 소위 말하는 신사도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유럽인들은 이 시기를 즈음해서 동양인들의 화약, 유리와 안경, 나침반, 종이와 인쇄술, 연금술과 의학을 수입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운동에 참전한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도 작용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이 발표한 완전 면죄부의 수여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곧바로 십자군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중세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교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개혁으로 끝맺음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성산지기(holyhillch)
  • 가격3,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860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