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졸업하였으며,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현재는 군승(軍僧)으로 산속의 작은 절에서 사신다.
생활 속에서 마음공부를 실천하는 ‘생활수행’이야기와, 내면의 뜰을 가꾸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소박하고 진지한 깨침의 이야기들을 정갈한 글로 엮어내시면서 인터넷을 통해 ‘아난 스님’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http://www.daum.net.에서 종교칼럼 ‘젊은 법사의 불교 이야기’ 칼럼니스트로, 또 2001년에는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http://www.moktaksori.com)\'를 개설하여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저서에는 「실천하는 수행자를 위한 반야심경 대강좌」와 「생활수행 이야기」, 「관심」,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히 걸어라」가 있다.
[인터파크 제공] [도서출판 무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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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세와 명예, 그리고 돈 등,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기업 회장이라도 돈많고 권세를 누리며 살겠지만,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느끼며 살고 그러다가 죽어갈 뿐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 또한 인생에 대한 인과 연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독재 정권을 아무리 길게 한 나라라 해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붕괴되고 마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고 내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사랑하는 이 또한 언젠가는 떠나가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 앞서 내 마음에서 처음 가졌던 사랑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이 육신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늙고 병들어 결국엔 죽어갈 것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잘생긴 외모를 받았더라도 살아가며 어떻게 마음을 쓰고 닦았느냐에 따라 외모 또한 변해갑니다. 우리 몸의 세포로 말한다면 순간 순간 끊임없이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숱한 생멸을 반복할 것입니다.
성격이 나일 것 같지만 성격 또한 천차만별로 달라질수 있습니다.
날 적부터 가진 능력과 재능은 항상 할 듯 하지만 나의 노력과 닦음을 통해서 그 또한 계발할 수 있으며, 그런 능력이라도 그저 방치해 두기만 한다면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은 변한다\'라는 그 진리일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우린 돈이 항상 할 때 행복을 느끼고, 명예가 권력이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행복을 느낍니다.
생명이 유지될 때 행복인 것이며, 사랑도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대상이 유지되는 동안 행복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박탈당할 때,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을 때, 죽어갈 때...
그때까지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항상하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이치 속에서 본다면, 당장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괴로움을 전제로 한 그런 잠깐 동안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에 빠져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중생의 소견을 어리석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렇게 \'변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불교의 근론 진리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
\'인생은 무상하다\'는 한탄스런 말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하다\'는 말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바가 아니요, 단지 항상 변해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데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약한 사람이 착하게 발심할 수 있으며,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 다시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다시 지혜로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상의 진리는 허무주의적이고, 괴로운 진리로 잘못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돌려서 받아들여, 무상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올바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변함\'이라는 그 자체는 그렇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분별심으로 재어 볼 잣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행무상이란 그대로 진리의 모습, 존재의 여실한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 그 어떤것이라도 항상하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중략
무아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고정불변한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라는 상을 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이 없는데, 내것이라는 것과 \'내가 옮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나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속성인 상일성(常一性)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고 , 내일도 \'나\'로 항상해야 참된 \'나\'라고 할수 있지 늘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수있겠으며, 내 마음대로 할수 있어야 \'나\'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서을 어찌 \'나\'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이 두가지 속성, 득 상일성과 주재성을 가져야 \'나\'라고 할수 있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항상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변화 할것이며 100년도 못 되어 완전히 변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듯 항상하는 상일성이 없으므로 무아라고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몸뚱이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그만 두고서라도 결정코 \'내것\'이라고 할수있는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내 마음 기쁘고 싶다고 기쁠수 있습니까.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인연따라, 상황 따라 그렇듯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행복, 불행, 고독, 허탈 등등의 마음을 오고 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이처럼 상일성도 주재성도 없는 텅 비어 있고 실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상일성도 주재성도 없는 \'나\'는 더 이상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아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아라고 하여 혀
생활 속에서 마음공부를 실천하는 ‘생활수행’이야기와, 내면의 뜰을 가꾸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소박하고 진지한 깨침의 이야기들을 정갈한 글로 엮어내시면서 인터넷을 통해 ‘아난 스님’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http://www.daum.net.에서 종교칼럼 ‘젊은 법사의 불교 이야기’ 칼럼니스트로, 또 2001년에는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http://www.moktaksori.com)\'를 개설하여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저서에는 「실천하는 수행자를 위한 반야심경 대강좌」와 「생활수행 이야기」, 「관심」,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히 걸어라」가 있다.
[인터파크 제공] [도서출판 무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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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세와 명예, 그리고 돈 등,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기업 회장이라도 돈많고 권세를 누리며 살겠지만,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느끼며 살고 그러다가 죽어갈 뿐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 또한 인생에 대한 인과 연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독재 정권을 아무리 길게 한 나라라 해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붕괴되고 마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고 내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사랑하는 이 또한 언젠가는 떠나가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 앞서 내 마음에서 처음 가졌던 사랑하는 마음은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이 육신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늙고 병들어 결국엔 죽어갈 것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잘생긴 외모를 받았더라도 살아가며 어떻게 마음을 쓰고 닦았느냐에 따라 외모 또한 변해갑니다. 우리 몸의 세포로 말한다면 순간 순간 끊임없이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숱한 생멸을 반복할 것입니다.
성격이 나일 것 같지만 성격 또한 천차만별로 달라질수 있습니다.
날 적부터 가진 능력과 재능은 항상 할 듯 하지만 나의 노력과 닦음을 통해서 그 또한 계발할 수 있으며, 그런 능력이라도 그저 방치해 두기만 한다면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은 변한다\'라는 그 진리일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우린 돈이 항상 할 때 행복을 느끼고, 명예가 권력이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행복을 느낍니다.
생명이 유지될 때 행복인 것이며, 사랑도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대상이 유지되는 동안 행복입니다.
명예와 권력이 박탈당할 때,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을 때, 죽어갈 때...
그때까지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항상하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이치 속에서 본다면, 당장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괴로움을 전제로 한 그런 잠깐 동안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에 빠져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니 중생의 소견을 어리석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렇게 \'변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불교의 근론 진리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
\'인생은 무상하다\'는 한탄스런 말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하다\'는 말은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바가 아니요, 단지 항상 변해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데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약한 사람이 착하게 발심할 수 있으며,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 다시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다시 지혜로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상의 진리는 허무주의적이고, 괴로운 진리로 잘못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돌려서 받아들여, 무상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올바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변함\'이라는 그 자체는 그렇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분별심으로 재어 볼 잣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행무상이란 그대로 진리의 모습, 존재의 여실한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 그 어떤것이라도 항상하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중략
무아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고정불변한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라는 상을 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이 없는데, 내것이라는 것과 \'내가 옮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나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속성인 상일성(常一性)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고 , 내일도 \'나\'로 항상해야 참된 \'나\'라고 할수 있지 늘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수있겠으며, 내 마음대로 할수 있어야 \'나\'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서을 어찌 \'나\'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이 두가지 속성, 득 상일성과 주재성을 가져야 \'나\'라고 할수 있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항상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변화 할것이며 100년도 못 되어 완전히 변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듯 항상하는 상일성이 없으므로 무아라고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몸뚱이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그만 두고서라도 결정코 \'내것\'이라고 할수있는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내 마음 기쁘고 싶다고 기쁠수 있습니까.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인연따라, 상황 따라 그렇듯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행복, 불행, 고독, 허탈 등등의 마음을 오고 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이처럼 상일성도 주재성도 없는 텅 비어 있고 실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상일성도 주재성도 없는 \'나\'는 더 이상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아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아라고 하여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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