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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이정희-김경오를 기록하고 있고, 박경원은 아예 기록에도 없다.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도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다.
▲ '중국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1970년, 여성지)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하고 조명하고 있는 수많은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 (<주간여성> 1969년 8월 27일자)' 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8년 2월부터 2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이다. 여기에서는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에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권기옥의 일대기를 '인물 춘추 -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46회에 걸쳐서 방송했다.
▲ '동양 첫 여류 비행사 권기옥 여사'(1978.2 한국일보 연재기사)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 '중국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1970년, 여성지)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소개하고 조명하고 있는 수많은 언론 보도들이 있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 (<주간여성> 1969년 8월 27일자)' 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8년 2월부터 24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나의 이력서'이다. 여기에서는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에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권기옥의 일대기를 '인물 춘추 -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이라는 제목으로 46회에 걸쳐서 방송했다.
▲ '동양 첫 여류 비행사 권기옥 여사'(1978.2 한국일보 연재기사)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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