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용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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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용의 의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실한 삶과 독실한 믿음과 깊은 기쁨이 아니면 어찌 이 같으리오.
도학(道學)의 진흥과 인재의 등용을 강조한 휴암(休庵)선생의 정성에 대하여는 송시열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경(聖敬)이 날로 발전하는 것으로 성학(聖學)을 만진(晩進)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누누히 도학의 부진(不振)으로써 근심하고,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請)하고, 송인수(宋麟壽) 등 모든 현인(賢人)의 원한을 신설(伸雪)하여 줄 것을 청(請)하였으며, 이황(李滉)을 불러서 대우할 것과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을 불러 써서 사림(士林)을 풍동(風動)시키고 사문(斯文)을 진기(振起)시킬 것을 청하고, 그 외에 언론(言論)과 풍지(風旨) 등 이루다 기록할 수 없으나 지성으로 지킴이 오직 여기에 있었다.
또한 송시열은 휴암선생이 위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道學)을 이어받아 아래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에게 전해준 공을 높이 평가하고, 송대의 양시(楊時 : 1053 - 1135)와 나종언(羅從彦 : 1072 - 1135)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그는 조광조의 미언(微言)과 지론(至論)으로서 (정암이) 참벌(斬伐)된 뒤에도 공공연히 칭송하여, 이신(二臣 : 李珥와 成渾)으로 하여금 들어서 알게하여 마침내 크게 되었으니, 비유하면 귀산(龜山)과 예장(豫章)같은 사람이다. 비록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있어서는 대소(大小)로 말할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가 위에서 이어받아 아래로 전하여 성도(聖道)를 더욱 밝혔으니 그 공(功)은 가히 성대(盛大)하다고 할 것이다. 그의 평생의 시말(始末)을 공정하게 생각하여 보건대, 진실로 이른바 유학의 선정(先正)의 종적(宗嫡)이요 후학들의 기중과 들보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휴암선생이 만년에 은거하던 파주일대는 마침 청송(廳松) 성수침(成守琛 : 1493 - 1564)을 비롯하여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등이 거처하던 곳이다. 청송(廳松)은 정암(靜庵)의 문인(門人)이며 우계(牛溪)의 부친으로서, 기묘사화 이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오직 수양과 학문에만 힘썼다. 일찍이 그는 1544년(중종 39)에 백악산 밑에서 돌아와 파산(坡山)에 살면서 휴암(休庵)선생과 동문의 벗으로 교유하고, 우계(牛溪)의 학문지도를 휴암선생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또한 파주는 율곡(栗谷)의 고향이기도 하며, 자운산 아래에는 율곡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모여 한 시대의 학풍을 열었으니,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 1610 - 1669)는 이를 파산학(坡山學)이라 칭하고, 휴암선생을 파산학의 개창자로 높였다.
그러므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 1629 - 1689)은 이를 칭송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파산(坡山)의 한 고을은,
가장 많은 유현(儒賢)들이,
일어나는 발자취라.
우계(牛溪)의 옛마을은,
학문 전한 죽우(竹雨)가정
화석(花石)의 높은 정자(亭子),
율곡(栗谷)의 옛날 고향이라.
오직 휴암(休庵) 큰 덕에는,
두 현인(賢人)도 경숭(敬崇)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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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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