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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자의 저서나 비평가의 평론집을 읽게 될 경우에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사항을 주목해서 살펴보기가 쉽다. 첫번째로는 그 책이 저자의 주체적인 관점을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제시해놓고 있는가 하는 사항이다. 본래부터 한 권이나 그 이상의 분량으로 기획 집필된 학술 저서일 경우에 이러한 사항은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특징이지만, 그때그때 발표된 논문이나 평론들을 묶어 펴낸 책의 경우에 이런 사항은 지켜지기가 어렵다. 그 책에 실린 각각의 글들이 학술지나 문예지에서 요청한 주제와 내용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예지에 실리는 평론의 경우에는 청탁의 기간도 짧을 뿐더러 글의 주제나 내용이 시의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필자 자신의 일관되고 깊이 숙고된 생각을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마치 속기로 바둑을 두어야 하는 부담을 그런 글들은 필자에게 안겨주기가 쉽다. 물론 평론집을 펴낸 경우에 평론가의 주체적이면서 일관된 관점을 다루는 글들만 모아놓았다고 해서 모범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글들보다 각각의 문학 작품들을 섬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이른바 실제 비평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이 평론집의 일반적인 모양이고, 평론집의 그런 모양이 평론가의 주체적인 문학관보다는 개개의 문학 작품에 대한 감식 능력과 해독 능력을 필수적으로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평론집을 읽으면서 보다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저자의 입장은 문학 이론가보다 현장 비평가의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현장 비평가의 입장이 반드시 개개의 문학 작품에 대한 감식 능력과 해독 능력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모자이크라는 미술 양식에서 개개의 다른 모양을 가진 형상들이 어울려 전체적인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듯이 개개의 문학 작품에 대한 논의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게 될 때 평론가 자신의 주체적이면서 일관된 문학관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권의 문학 평론집을 읽으면서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평론가의 주체적인 문학관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읽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평론집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평론가 자신의 주체적인 문학관을 피력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대개의 평론집들은 그 속에 실려 있는 몇 편의 글들 속에서, 또는 글쓰기의 편리한 형식을 이용하여 평론가의 주체적인 문학적 입장을 내보일 때가 많다. 90년대에 들어서 발간되고 있는 평론집들은 대개 메타비평적인 담론의 형태를 취한 몇 편의 글들을 책의 한 부분으로 엮어놓고(보통은 그런 글들이 평론집의 1부로 구성된다) 그 속에 평론가의 주체적인 문학관을 피력하는 것이 상례고 자신의 문학관을 매번 발표하는 글마다 서론의 형식으로 소개하는 방법은 오랜 관행이 되어버린 형편이다.
본문내용
그러나 문학 작품으로서 일차 텍스트의 역할을 위축시켜놓은 보다 큰 원인은 그의 확대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욕망은 일차 텍스트의 영역을 보다 확대해놓고 싶은 것이다. 사실상 책읽기의 부지런함이 가장 익숙한 습관으로 자리잡은 사람에게 한 권의 책에 대한 욕망이나 책임감은 약화되기가 쉬운 법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욕망이나 책임감이 들어앉았던 자리에 수많은 책읽기에 단련이 된 사유의 주체를 들어앉히고 싶은 욕망도 생겨날 수가 있다. 그런 욕망에 의하여 “문학과 사회에 대한 넓은 고찰이, 양자의 관계가 참으로 역사의 포괄적 움직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면`─`사실 인간사의 많은 것이 그러한 것이라면, 작품 하나를 두고 또는 어느 한 사건을 두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수밖에 없다”(『김우창 전집 4』, p. 243)라는 발언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김우창 교수의 후기 저서에서 일차 텍스트의 비중이 약화되고 있는 점은 그러한 욕망과 연루되어 있다. 일차 텍스트가 들어앉았던 자리에 사유하는 주체가 들어앉고 그 주체와 이차 텍스트와의 역동적인 상보와 지양의 관계가 그의 글쓰기의 욕망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이라 판단해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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