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의 마이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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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어는 정말 훌륭한 연설을 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 “일을 하고 세금을 내는 모든 사람들, 아이를 키우고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우리의 잊혀진 중간계급을 구성하고 있는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들의 이름으로, 나는 자랑스럽게 미합중국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중간계급 출신이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은 이제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나는 미국의 단결을 호소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어린 시절 이후로 늘 신봉해온 것이었다.
다음 날인 7월 17일 아침, 나는 앨, 티퍼, 힐러리와 함께 뉴저지로 가서 미국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버스 유세를 시작했다. 이 버스 유세는 일반 유세에서는 무시하는 작은 도시나 시골 지역을 찾아가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우리는 예정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면 버스에서 내려 거리 유세를 하고 악수를 했다. 버스 유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경제 재건과 의료보험 개혁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동안, 공화당은 나를 중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시의 전당대회 효과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이제 선거운동의 기본 구도는 자리가 잡혔다. 부시는 가족 가치와 신뢰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으며, 나는 경제적사회적 변화를 옹호했다. 초당파적인 전국위원회는 각기 다른 형식으로 세 번 토론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나는 즉시 받아들였지만, 부시 대통령은 위원회의 토론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달 말에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로스 페로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뛰어드는 문제를 고려 중이라고 발표했다. 페로가 다시 선거전에 복귀하면서, 우리는 마침내 부시 쪽 사람들과 토론회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양쪽 선거운동본부는 토론회에 페로를 초대하기로 합의했다.
마침내 1차 토론회가 10월 11일 일요일에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에서 열렸다. 좋은 소식은 부시 대통령이 점수를 전혀 따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쁜 소식은 페로가 국민의 눈에 다시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토론회 이후의 여론조사를 보니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제 나의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에 대해 더 신뢰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틀 뒤인 10월 15일 밤에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2차 토론회가 열렸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토론회였다. 아직 찍을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지역 유권자 대표들이 질문을 하는 시민 대표자 회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AP 연합이 인터뷰한 5명의 토론 지도자는 스타일, 구체성, 편안함이라는 면에서 내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런 토론 형식은 선거 기간 내내, 그리고 그 오래 전부터 아칸소에서 내가 늘 일해오던 방식이었다. 나는 국민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들의 여과되지 않은 판단을 신뢰했다. 3차 토론회를 향해 나아가면서 CNN/「USA 투데이」의 여론조사는 내가 다시 15포인트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47퍼센트였고, 부시가 32퍼센트, 페로가 15퍼센트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토론회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마지막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0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 선거운동에서 앨 고어와 나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게이트’ 문제를 공격함으로써 우위를 지키려 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후원하는 채권이 이탈리아 정부 소유의 한 은행의 애틀랜타 지점을 통해 이라크로 흘러 들어간 사건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농업에 쓰려는 목적이었지만,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뒤 이 채권을 이용하여 군사 및 무기 프로그램을 재구축했다. 20억 달러 상당의 채권은 상환되지 않았으며, 미국 납세자들이 대신 그 돈을 내야 했다. 선거 전 금요일 이란-콘트라 특별검사이며 오클라호마 출신의 공화당원인 로런스 월시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국방장관 캐스퍼 웨인버거를 비롯한 6명을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레이건의 백악관이 인가한 이란에 대한 불법 무기 판매에서 부시 대통령이 전에 인정한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부시 대통령에게 피해를 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정치 지도자들의 결정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또 미국인들에게 큰 도박을 하라는 요구를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온 마음으로 미국 국민에게 나를 선택하는 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이라고 이야기하려 했다. 계속 흔들리는 여론조사 결과나 페로의 재등장을 보면, 그들 가운데 다수가 나를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의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1월의 그 기나긴 날, 나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전체 투표자 수는 엄청났다. 투표율도 1960대 초 이후 가장 높았다. 총 1억 460만 366표 가운데 내가 43퍼센트, 부시 대통령이 37.4퍼센트, 로스 페로가 19퍼센트였다. 선거인단에서의 표 차는 더 컸다. 힐러리와 나는 승리 연설문을 마지막을 살펴본 뒤 하나님께 우리가 받은 축복에 감사드리고, 앞일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우리는 첼시를 데리고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로 차를 달렸다. 그곳은 내가 16년 전 법무장관 취임 선서를 할 때 축하 손님들을 영접한 곳이며, 13개월 전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곳이었다. 우리는 연단으로 올라가 앨과 티퍼 고어 부부와 인사를 하고, 시내 거리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군중에게도 인사를 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과 로스 페로에게, 투표한 사람들도 나와 함께 “다시 결합된 합중국"(re-United States, 미국의 정식 명칭을 이용한 표현)을 만들자고 당부한 다음 이런 말로 연설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미국인이 되어달라고 당부합니다. 얻는 것만이 아니라 주는 데, 비난을 하는 데만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데, 자신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돌보는 데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가 이 땅에 자리 잡을 때 가졌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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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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