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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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이쇼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수했다. 1913년(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내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수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육상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상을 얻지 못한채 사임할 수밖에 없어, 당시 육상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상의 사표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의 육상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상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타파, 헌정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히라 다카시나,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측에서는 영국의 조지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
결국, 호헌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대표로서 출석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수상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정해졌다.
쇼와
1926년(쇼와 원년) 12월 28일, 황위를 계승한 직후의 쇼와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특별히 칙어를 내려(대훈위 공작 사이온지긴모치에게 주는 칙어), 이것에 의해 사이온지가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떠맡는 것이 사실상 확립됐다. 그는 1940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 탄생 전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각수반 지명에 계속 관여하게 된다. 1936년의 2·26사건때는, 궐기장교의 일부가 사이온지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습격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로 사이온지를 군측의 간사한 수괴로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부정파는 천황과의 연결책으로 사이온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표면상 구실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 스루가타이의 본가 외에, 시즈오카 현의 고텐바초의 우편선총별장, 같은 시즈오카현 오키쓰의 자교소, 교토의 세이후소우의 각 별장에 은둔생활을 하며, 원로로서 중심을 이루었다. 최후의 만년이 되면, 피서를 위해서 고텐바에 체재하는 것 이외에는 일년의 대부분을 겨울의 기온이 온화한 자교소에서 보내었다.
1937년의 고노에 후미마로 1차 내각 성립 이후엔 점차 정치 표면에서 물러나, 계속 반대했던 삼국(독일-이탈리아-일본) 군사동맹 성립 2개월 후에 사망했다. 기대를 걸었던 고노에게도 배반당해 그를 수상으로 추천한 일을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대체 어디로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냐”라고 전해진다.
1941년 고노에 내각의 브레인을 맡던 손자 기미카즈가 조르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다.
사이온지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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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해, “과학, 영어, 여자 교육을 중시하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0년에 이노우에 다케시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반대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교육칙어 개정허가를 얻은 것과 동시에, 제2차 교육칙어의 작성에 임했다. 이 2차 교육칙어의 초안은, 사이온지가로부터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아래의 교육기관 설립에도 관여하고 있다.
리쓰메이칸 대학 : 1869년 사숙, ‘리쓰메이칸‘ 창설(교토부청 태정관 류수관의 차출명령에 의해 약 1년만에 폐쇄되었다), 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의 이름은 문부대신 당시의 비서관 나카가와 고주로가 양도받은 것으로 리쓰메이칸 사숙과 직접적 연결은 없다. 그러나 대학의 전신인 교토 법정 학교 설립시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친아우 스에히로 다케마로가 학원강사로 취임하고 있던 관계 등으로 인해 사이온지 긴모치가 숨을 거둔 1940년 리쓰메이칸 대학의 학조로 결정했다.
1880년 메이지 법률 학교(현재의 메이지 대학) 창설에 협력.
1897년 제2제국대학(현재의 교토 대학)을 교토에 유치.
1901년 일본 여자 대학의 설립 발기인·창립위원.
주석
↑ 공가 중에서는 섭관가 다음의 서열로 다이조 다이신(태정대신)을 맡을 수 있는 가문을 말한다.
↑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차남
↑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에 걸쳐 참정권, 자치권의 성립 , 헌법 제정, 국회 개설 등을 이끌어낸 국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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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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