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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떼어 놓기도 했다. 나는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혜시와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부순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공손룡이 말을 타고 국경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관문을 지날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우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은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는 그대로 말을 탄 채 관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공손룡자>에 나오는 여러 명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이 고사와 관련 있는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입니다. 또 하나는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7. 흰 말은 말이 아니다
공손룡이 흰 말을 어떻게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가를 봅시다. 그는 세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말이라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희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빛깔을 가리키는 것은 형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둘째, 말이라고 하면 흰 말, 검은 말, 누런 말이 모두 해당되지만, 흰 말이라고 하면 누런 말이나 검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셋째, 말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말에서 빛깔을 빼 버리면 말 그 자체만 남는다. 흰 말은 바로 그러한 말에다가 흰 색을 더한 것이다. 이처럼 말에다 흰 색을 더한 것이 흰 말이기 때문에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사실 흰 말과 말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려면 '흰 말은 말의 일종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또 공손룡의 말대로라면 흰 말은 말이 아닌 소나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의 본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개념들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손룡은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한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8. 상식을 부정하는 참 의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여섯 학파로 나누어 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글에서 명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문구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엄밀하게 밝혀서, 남들이 자기 뜻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을 명확히 밝히려다가 상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과연 명가의 논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담의 '상식을 벗어났다'고 한 것처럼 명가의 실제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동쪽이 옳다고 할때 서쪽을 말했으며, 북쪽을 옳다고 할 때 남쪽을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는 남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따르게 할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상식들이 많습니다.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식들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신화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아야 한다'라든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뱁새는 부지런히 황새를 쫓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꾸면 어떨까요? 아마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논리성을 갖추었던 명가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명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방법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은 법가 사상의 지원을 받은 진나라가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끝나게 됩니다. 진나라는 초기부터 도량형이나 많은 문물 제도를 통일시켰고, 나아가 분서 갱유를 통해 사상마저 통일시키려 했습니다.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했지만, 바로 뒤를 이은 한나라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실 통일 국가는 혼란기 동안 흔들렸던 많은 부분을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아래서 상식을 부정하는 명가 사상이 후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혜시와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부순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공손룡이 말을 타고 국경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관문을 지날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우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은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는 그대로 말을 탄 채 관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공손룡자>에 나오는 여러 명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이 고사와 관련 있는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입니다. 또 하나는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7. 흰 말은 말이 아니다
공손룡이 흰 말을 어떻게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가를 봅시다. 그는 세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말이라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희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빛깔을 가리키는 것은 형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둘째, 말이라고 하면 흰 말, 검은 말, 누런 말이 모두 해당되지만, 흰 말이라고 하면 누런 말이나 검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셋째, 말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말에서 빛깔을 빼 버리면 말 그 자체만 남는다. 흰 말은 바로 그러한 말에다가 흰 색을 더한 것이다. 이처럼 말에다 흰 색을 더한 것이 흰 말이기 때문에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사실 흰 말과 말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려면 '흰 말은 말의 일종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또 공손룡의 말대로라면 흰 말은 말이 아닌 소나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의 본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개념들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손룡은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한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8. 상식을 부정하는 참 의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여섯 학파로 나누어 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글에서 명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문구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엄밀하게 밝혀서, 남들이 자기 뜻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을 명확히 밝히려다가 상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과연 명가의 논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담의 '상식을 벗어났다'고 한 것처럼 명가의 실제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동쪽이 옳다고 할때 서쪽을 말했으며, 북쪽을 옳다고 할 때 남쪽을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는 남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따르게 할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상식들이 많습니다.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식들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신화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아야 한다'라든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뱁새는 부지런히 황새를 쫓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꾸면 어떨까요? 아마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논리성을 갖추었던 명가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명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방법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은 법가 사상의 지원을 받은 진나라가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끝나게 됩니다. 진나라는 초기부터 도량형이나 많은 문물 제도를 통일시켰고, 나아가 분서 갱유를 통해 사상마저 통일시키려 했습니다.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했지만, 바로 뒤를 이은 한나라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실 통일 국가는 혼란기 동안 흔들렸던 많은 부분을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아래서 상식을 부정하는 명가 사상이 후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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