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의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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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성으로서의 덕혜옹주

본문내용

쯤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 병원으로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송택병원에 가보니, 무슨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돌며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마치 감방 모양으로 쇠창살로 막고 있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가,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췄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 여세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후신(後身)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 동안을 오래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 하실까?
어느 나리이고 왕가의 종말에는 허다한 비극이 깃드는 법이지만 고종의 고명 따님이신 덕혜옹주의 말로가 이다지도 비참하게 될 줄이야 어찌 뉘라서 상상인들 하였으랴!" <"인간 이은(李垠)"> P. 56.
김을한 씨는 이 글 외로도 직접 들려준 이야기는 더더욱 비참하였습니다. 덕혜옹주가 갇혀있는 독방은 독방이 아니라 한 방에 서너 명의 걸인(乞人)과 같은 여인들이 둘러앉아 화롯불을 쪼이면서 화롯불을 쪼이고 있는 그 손들이 모두 새까만 것이 가만히 보니 때는 11월이었고, 양말도 신지를 못한 채 맨발이었다는 것입니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 고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옹주가 고국 땅에 돌아오기까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배려와 힘이 컸었고, 음으로 양으로 언론인 김을한 씨의 적지 않은 힘과 운현궁의 박찬주(朴贊珠) 여사의 노고가 없었던들 옹주의 귀환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덕혜옹주가 귀환하여 고국에 돌아왔을 때의 옹주의 나이는 이미 50을 넘기고 있었습니다.처녀시절 일본에 건너갔을 시에는 그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던 덕혜옹주의 패기 찬 모습은 지금 40여 년을 지나서 고국 땅을 다시 밟는 불쌍한 덕혜옹주 지금의 모습에서는 아예 처녀시절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녀가 고국 땅을 다시 첫발을 내디디고 저 했을 때 옹주를 길러주었던 유모 변씨가 달려와 옹주를 끌어안으면서
"아기씨! 아기씨!"
하며 달려들어 엉엉 울다가 그만 혼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광경을 덕혜옹주는 느끼지도 못하고 넋 나간 멍한 눈길로 쓰러진 유모를 잠깐 내려다보고 말았다고 합니다. 단 어떠한 한 마디의 말도 하질 못하고 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유모 변씨는 세상을 하직하였고, 옹주는 아직도 정신질환이 모두 치유가 되질 않아서 짙어진 병색은 그녀를 더 오래 살아있게 하진 못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어느 날, 별로 이름 없는 병원의 한 병동에서 고요히 고통 없는 생애를 막음하였습니다. 그래도 바로 이 해에 친지 몇 사람과 늙은 상궁들 몇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화려하지 않은 조촐한 환갑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요. 참고로 환갑 때 찍으셨던 사진 한 장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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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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