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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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누가복음 주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17절)
II.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8-45절)?
III. 제자도: 겸손하지만 당당하게(46-62절)
주석

본문내용

주지 않는다 해서 그것을 자존심과 연결하여 미워하거나 공격하거나 죽이려 해서는 예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편협한 근본주의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편협하지 않다. 혼합주의는 금물이라도 포용의 자세는 절대적으로 미덕이다. 링컨이 그랬다 하던가? 적과 싸워 멸절시키려 하면 적은 더 커진다. 그보다는 적이 내 편이 되게 하는 것이 낫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햇볕정책이 고수(高手)인 것 같다.
(다) 앞만 보고 전진(57-62절)
(1) 제자가 됨은 이른바 문화 생활의 일부가 아니다. 적당히 시간이 남으면 약간 신경을 쓰는 취미 생활이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예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을 뜻한다. 아마 여차하다 보면 예수가 자신의 처지를 그렸듯이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의 신세가 될 수도 있다(57-58절). 잠자리가 없다는 것은 보장된 정착으로 오는 삶의 안일을 포기해야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역을 위한 생활의 수단도 없을 것이라 짐작할 필요는 없다. 마태의 예수의 가르침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생활의 기본은 책임지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6:33). 하지만 생활의 보장을 위해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착오이다. 노숙자의 처지가 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로 제자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2) 유대인에게 있어서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치러야 할 종교적 의무로 여겨졌다. 그렇게 중요한 율법 공부도 이 보다는 긴급하지 않다. 더구나 부친을 장사하는 것은 가장 급박한 일이었다(창 50:5, 토빗서 4:3, 6:15).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일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60절). 더구나 그보다는 비중이 낮은 가족과의 작별 인사조차도 시간이 없으니 하지 말라 하신다(62절). 뒤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빨리 자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산상수훈의 몇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과장법(hyperbole)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부친 장례를 참석 못하게 하거나 가족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금지하셨을 리는 없다. 그 정도로 예수를 따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것을 역설하심이다. 주를 따라가 제자가 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으면 이것이 삶의 전부이다. 제자도를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주석
1) 헬라 원문의 경우는 이렇게 통계를 낼 수 없다. 예를 들어 1절의 '열두 제자'도 헬라 원문에서는 '투스 도데카'로서 그저 '열 둘'(The Twelve)이며 6절의 '제자들'도 헬라 원문에서는 주어로 명시되지 않고 그저 동사형이 '그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들을 독특하게 '사도'라고 표현한 경우(10, 12절)까지 포함하면 13회가 된다. 실상 헬라 원문의 '마쎄테스'(=제자)의 등장 회수로 보더라도 9장이 6회로 최고의 위치에 있다. 6장에서 5회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는 12 제자의 부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 김득중은 오병이어 기사(記事)의 목적이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 본다. 비록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께서 주신 권능으로 아픈 자들을 고쳤지만 예수처럼 5 천명 이상을 먹이는 권능은 행사하지 못했고, 그 일로 예수의 특수함을 보이려 했다는 주장이다(「누가복음(1)」, 대한기독교서회, 469-471). 이 일이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시키면서 창조주요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예수의 정체에 암시하는 구실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1-6절에서 고양된 제자들의 능력을 현실화하려는 고의성을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복음서 일화의 기조는 일관성을 갖는다. 제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제한된 자원을 갖고 있고 그래서 무능하며 무력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개입하시면 그 무능은 권능이 되고 무력(無力)은 강력(强力)이 된다. 그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다.
3) 베드로의 고백은 당시의 메시아관을 반영하고 있다. 쿰란 공동체의 경우에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를 동시에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역할을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에서 확인하고 있다. 물론 이런 관점은 기존 당대 문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제자들과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예수의 함구령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기인한다.
4) 23절 헬라 원문을 이끄는 동사 dei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 함의가 너무 약하다. 그 어감을 살리려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만 하리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5) 여기서 한글개역성경에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단어는 exodos로서 '탈출', 또는 '떠남'이라는 뜻이다. 누가가 예수의 죽음을 영광의 승천과 동일시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관점과 유사하다.
6) "저의 말을 들으라"(autou akouete)는 뚜렷하게 「70인역」의 신명기 18:15(autou akousesthe)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 - IX (New York and others: Doubleday, 1981), 803; I 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8), 388.
7) 민수기 11:24-30의 모세의 자세와 비슷하다. 성막에 나아오지 않고 자신의 진중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엘닷과 메닷에 대해 여호수아는 금지를 요구했으나 모세는 대승적 자세로 수용한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
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411.

키워드

누가,   복음,   주해
  • 가격3,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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