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혁주의신학
Ⅱ. 개혁주의 생명신학
Ⅱ. 개혁주의 생명신학
본문내용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종성은 이러한 박형룡의 패쇄적인 신학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다.
여기에 박형룡 신학의 대표적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70년 전 또는 80년 전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신학에 대하여 70∼80년 후에 와서도 그 신학이 어떠한 신학이었던가 검토하거나 평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받아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고 새 세대에 전달하려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그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동결 또는 고사를 의미한다33)
5) 개혁주의 신학과 박형룡의 신학의 한계점
박형룡의 신학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것은 바로 성령론이다. 그 이유는 그의 교의신학 체계는 미국 미시간 주(州)에 있는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벌코프(Louis Berkhof)의 신학체계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교의신학 전집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벌코프의 교의신학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벌코프는 20세기 중엽까지 미국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학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한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총신대의 김의환은 “그의 조직 신학에서 성령론 취급은 지극히 미흡하다. 카이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반론이라도 전개하면서 신론, 기독론과 함께 비중있게 취급했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오늘날 성령론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실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성령론 취급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34)라고 평하였다.
비단 벌코프만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벌코프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브라함 카이퍼나 바빙크 역시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특히 카이퍼의 성령론은 현재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전(前) 총신대 총장 차영배에 의해서도 강도 있게 비판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모든 그룹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게 된 이유를 이종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가 기독론 형성에 많은 관심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성령에 관한 연구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콜라신학을 발전시킨 결과 역시 성령론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개혁자들이나 그들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성서적이었으나 성령론에 관한 장을 가지지 않았다. 개혁교회 신학은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였다35)
성령론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전개한 박형룡 신학에서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박형룡은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인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특별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어졌던 것으로 교회시대에 중단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했다.”36)
또한 이러한 박형룡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들 역시 성령론을 소홀히 취급하였고 급기야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의 은사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사의 오순절 운동과 신유와 축사들을 동반한 은사주의 운동들은 이단시 되거나 백안시 되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前) 총신대의 차영배 교수, 전(前) 고신대의 안영복 교수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으나 아직 그의 여파는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패쇄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과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은 한국 교회사에 일어난 일련의 신앙부흥 운동,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들을 정죄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며 일체의 신앙체험을 등한시 하는 흐름과 성령의 말미암은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운동과 방언, 신유 등 이적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상생(相生)하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의 길만을 고집하게 된다.
Ⅲ. 결 론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구원에 국한시키기에 오순절 운동을 위시한 ‘능력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절음발이 신학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이 단회적이며,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종료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함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 하거나 백안시 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학의 바운더리(Boundary)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면서도 개혁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개혁 되었기에 개혁 되어야 한다”라는 그들의 신학의 원리마저도 망각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석화된 한국교회 상황에서 태동된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객관적인 진리와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조화시키려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구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구원의 복음,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 오직 아들에 대한, 아들에 의한, 아들을 위한 신본주의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에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으나 그 중심에는 성경을 닮고자 하는 ‘성경닮기 운동’이 있다. 베뢰아 운동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론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교리보다 예수를, 신학보다 성령을, 주석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운동인 것이다.
신학은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신학은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는 예수보다는 교리를, 성령보다는 신학을, 성경보다는 주석에 더 관심이 있지 않은가!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이란 ‘말씀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살 길이다.
여기에 박형룡 신학의 대표적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70년 전 또는 80년 전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신학에 대하여 70∼80년 후에 와서도 그 신학이 어떠한 신학이었던가 검토하거나 평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받아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고 새 세대에 전달하려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그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신학의 동결 또는 고사를 의미한다33)
5) 개혁주의 신학과 박형룡의 신학의 한계점
박형룡의 신학 중에서 가장 취약한 것은 바로 성령론이다. 그 이유는 그의 교의신학 체계는 미국 미시간 주(州)에 있는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벌코프(Louis Berkhof)의 신학체계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박형룡은 교의신학 전집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벌코프의 교의신학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벌코프는 20세기 중엽까지 미국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신학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한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총신대의 김의환은 “그의 조직 신학에서 성령론 취급은 지극히 미흡하다. 카이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반론이라도 전개하면서 신론, 기독론과 함께 비중있게 취급했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오늘날 성령론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실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성령론 취급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34)라고 평하였다.
비단 벌코프만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벌코프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브라함 카이퍼나 바빙크 역시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특히 카이퍼의 성령론은 현재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전(前) 총신대 총장 차영배에 의해서도 강도 있게 비판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모든 그룹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게 된 이유를 이종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가 기독론 형성에 많은 관심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성령에 관한 연구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중세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스콜라신학을 발전시킨 결과 역시 성령론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개혁자들이나 그들의 후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성서적이었으나 성령론에 관한 장을 가지지 않았다. 개혁교회 신학은 이러한 전통에 따라 성령론을 가볍게 취급하였다35)
성령론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전개한 박형룡 신학에서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박형룡은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인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특별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어졌던 것으로 교회시대에 중단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했다.”36)
또한 이러한 박형룡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들 역시 성령론을 소홀히 취급하였고 급기야 성령으로 말미암은 방언의 은사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사의 오순절 운동과 신유와 축사들을 동반한 은사주의 운동들은 이단시 되거나 백안시 되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前) 총신대의 차영배 교수, 전(前) 고신대의 안영복 교수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으나 아직 그의 여파는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패쇄적인 성경해석학적 입장과 성령론의 불균형적 취급은 한국 교회사에 일어난 일련의 신앙부흥 운동,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들을 정죄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는 오직 성경 무오성과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며 일체의 신앙체험을 등한시 하는 흐름과 성령의 말미암은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운동과 방언, 신유 등 이적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상생(相生)하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의 길만을 고집하게 된다.
Ⅲ. 결 론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구원에 국한시키기에 오순절 운동을 위시한 ‘능력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절음발이 신학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이 단회적이며,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종료되었다는 ‘은사 종료설’을 주장함으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 하거나 백안시 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학의 바운더리(Boundary)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면서도 개혁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은 개혁 되었기에 개혁 되어야 한다”라는 그들의 신학의 원리마저도 망각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석화된 한국교회 상황에서 태동된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은 객관적인 진리와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조화시키려는 ‘진리회복 운동’이며 ‘신본주의적 성령 운동’이다. 구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구원의 복음,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 오직 아들에 대한, 아들에 의한, 아들을 위한 신본주의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베뢰아 운동이다.
베뢰아 운동에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으나 그 중심에는 성경을 닮고자 하는 ‘성경닮기 운동’이 있다. 베뢰아 운동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론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교리보다 예수를, 신학보다 성령을, 주석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환언운동인 것이다.
신학은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 신학은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는 예수보다는 교리를, 성령보다는 신학을, 성경보다는 주석에 더 관심이 있지 않은가!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이란 ‘말씀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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