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기원과 발발 그리고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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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25전쟁의 기원과 발발 그리고 그 영향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전쟁 직전의 남ㆍ북한의 상황 (1945~50)
 1. 한반도의 정세
 2. 남한의 상황
 3. 북한의 상황
Ⅲ. 전쟁의 시작과 전개 과정
Ⅳ. 6.2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Ⅴ. 나가며

본문내용

제를 논의하는 정치회의가 4월 26일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Ⅳ. 6.25 전쟁의 결과 및 영향
6.25 전쟁의 결과 한반도 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여러 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전쟁의 피해로 한반도는 폐허로 변하였고, 전쟁 직후 남북한은 복구 사업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경제 복구 사업도 진행되었는데, 이때 남북한은 각각 다른 경제체제를 강화하였다. 남한은 미국과 긴밀하게 연계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해나갔고, 북한은 집단농장 중심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진행해나갔다. 서로 다른 경제체제가 남북한에서 각각 피어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결과 남북 간에는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전쟁 이전에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분단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되고 그 속에서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그리하여 남한에서는 ‘반공’정신과 ‘김일성괴뢰도당타도’의 구호를 내걸었으며 북한에서는 ‘반미’, ‘이승만괴뢰도당타도’의 구호를 각각 내걸었다. 이렇게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했으며 더불어 자신들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나남출판, 1996, 885쪽.
남한에서는 ‘반공’정신이 강화되어 국가보안법 하에 사상은 검열되었으며, ‘반공’정신으로 국민들을 재무장시켰다. 굳이 국가가 나서서 사상검열을 하지 않아도 보수언론단체에서 알아서 사상을 검열할 정도로 당시 반공정신은 국민들에게 내재화되었다. 그리고 국가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면 바로 좌익으로 몰아가며, 일명 ‘빨갱이’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민족통일이나 정권에 반대하는 단체들은 친북, 좌익이라 규정하는 것이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또한 6.25 전쟁은 한반도 내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 결과 냉전체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을 강화해나갔고, 각자 여러 각국과 개별적으로 군사동맹을 맺으며 서로에 대항하였다. 이에 유럽은 냉전의 분위기가 강화되자 그들 스스로도 군비확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도 패전을 이겨내며 군사력을 확충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소련에서 흐루시쵸프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탈냉전시대로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소련은 제 3세계의 국가에게도 경제원조를 진행하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이렇게 세계사적 차원에서는 냉전이 해체되었지만 한반도내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전협상이 체결되었지만 전쟁 이후 지금까지도 남북한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수없이 발생했다. 동해와 서해에서의 교전, 휴전선에서의 충돌 등 남북한 사이의 갈등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이렇게 6.25 전쟁은 국내외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국내에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전쟁 이후에도 분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픔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냉전의 현실 속에서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6.25전쟁은 국제 질서를 재편성하며 냉전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6.25 전쟁은 분명히 세계의 분할, 냉전과 맞닿아있었다. 남북한 체제로서의 갈등은 6.25 전쟁을 계기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분단을 이겨내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단순히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세계정치의 전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박명림, 앞 논문, 888쪽.
Ⅴ. 나가며
이제까지 6.25 전쟁에 대해 원인과 배경에 해당되는 전쟁 직전의 국내외적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는 6. 25 전쟁의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까지도 과거 6.25 전쟁의 연구에 새로운 시각에서의 연구와 해석이 제기되고 있으며,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 전쟁의 기원을 어디로 두느냐에 따라 전쟁의 성격과 의미가 첨예한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6.25 전쟁이 외세의 개입에 의해 더욱 격렬화 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전쟁은 해방직전 한반도 문제를 놓고 회담에서 첫 논의를 시작한 때부터 이미 고개를 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6.25 전쟁은 냉전체제 초기의 불안한 국제정세를 반영한 축소판이었다. 양극체제의 세력 확대 속에서 마찰을 빚은 갈등이 당시 한국의 독특한 상황과 만나 전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한편, 6.25 전쟁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한국인들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은 향후 6.25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은 지배자들의 논리에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거 반공정권이 전통주의적인 시각을 미국 우호적 극우진영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권력과 손잡은 지배자들의 논리에 흐려져 6.25 전쟁을 과거의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외세의존적인 사고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6.25 전쟁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시대의 한국 내부의 상황과 대외 관계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역사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미래에 대한 조망을 하는 시각의 통합이 중요하다. 이것이 끝나지 않은 전쟁을 계속 이어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극동군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을 미화하고 우상화 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참고문헌>
김학준, 『한국전쟁』, 박영사, 2003,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나남출판, 1996.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이규태, 『내일을 여는 역사 - 왜 38선은 그어졌는가』, 신서원, 2000.
한철호 외, 『고등학교 한국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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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2.11
  • 저작시기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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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25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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