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 절두산 성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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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서 - 절두산 성지를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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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절두산 성지-라고 하면 솔직히 이름부터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절두산이라니
목이 떨어졌다는 소리지 않는가? 슬슬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시점이라 그런지 반팔을 입었는데도 녹아내릴것만 같던 초여름날에, 우리는 절두산 성지로 향했다.

원래 절두산 성지의 원 이름은 잠두봉(蠶頭峰)이다. 누에고치의 머리마냥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잠두봉이었으나. 1866년 천주교 박해 당시, 수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하였다고 해서 이름까지 절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더던 양화나루가 있던 곳이다. 양화(버들꽃)라는 말은 인근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한강에는 18개의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광나루, 삼밭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양화나루를 5대 나루라고 한다.

특히 양화는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있는 교통요지였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는 양화를 경유하는 강화로를 전국 10대 대로중에 6대대로로 명명되어 있다. 강화로는 서울에서 양화, 양천, 김포를 거쳐 강화도 교동까지 연결된 조선시대 중요한 도로이다.

경제적으로는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운반하는 중요한 조운항구였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진을 구축하고 어영청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또한 직접 가보면 느끼지만 풍경이 아름답다. 지금과 같이 한강 양 옆에 도로가 있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워서 뱃놀이를 즐기고 정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조선후기에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1866년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심화되었다. 프랑스군은 1866년 8월 침략을 위한 사전준비로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왔다가 그해 9월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때 길잡이 노릇을 한게 천주교인이었다.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 무리의 피로 씻어야 한다”
며 천주교도 처형지를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에서 절두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프랑스의 조선 침략의 원인을 천주교인에게 돌리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당시 확인된 순교자만 29명이라고 한다.

병인양요를 계기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이어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는데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글이 쓰여져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일본에 의해 준비되지 않은 개항으로 인해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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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15
  • 저작시기2013.2
  • 파일형식기타(docx)
  • 자료번호#83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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