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 말이 가진 뜻과 같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르술라 가족들이 느끼는 백년동안의 고독.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고독이 과연 ‘백년’이라는 시간동안 느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이 느끼는 고독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의 고독은 백년보다는 훨씬 적은 기간동안 사람들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우르술라 가족의 이름이 대를 이어서 되풀이되어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들의 되풀이되어지는 고독은 세대를 이어 결국엔 소멸하는 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고독이라는 것은 우리네 삶에 있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우리의 일부가 아닐까?
얼마 전에 본 영화가 있다. 코믹 잔혹물 형식의 『조용한 가족』이라는 영화였는데 거기서 이런 얘기가 있었다. 한 투숙객이 종업원(그 가족의 한 구성원)에게 묻는다, “학생, 고독이 뭔지 알아?”.... 그러니까 학생은 “저,,, 학생 아닌데요?!” 아마도 이런 대사는 관객들을 웃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에 그 투숙객은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고독 때문에 말이다.
이 글 속에서도 우르술라 가족들은 고독을 잊기 위해, 아니 영원히 떨쳐버리기 위해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의 성관계를 맺거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파티를 열거나, 아니면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자신만의 일에 몰두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결코 그들에게 고독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을 쓴 채 자신들의 진실을 감추는 그러한 행동은 그들을 더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빠트릴 뿐이다. 이러한 그들의 삶, 아니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몸부림을 볼 때, 가슴이 너무 답답했으며, ‘꼭 그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독을 안으로만 삭힐 뿐 서로의 마음을 터놓지는 않았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렇듯이 말이다. 진정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는 『어린왕자』에서의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관계어린왕자와 고향별의 장미와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길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도, 몸과 몸을 맞대는 것도 아닌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통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했다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모두에게 잊혀질 가족사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책을 읽으면서 아니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이들의 가족사에는 항상 여성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 가족이 영위해 온 백년동안 그들의 축, 다시 말해서 가족을 이끌어간 중심은 여성이었다. 이런 생각이 든건 아마도 내가 feminism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래서 내겐 부엔디아 가족이 아닌 우르술라 가족이다- 그들이 처음 마콘도에 정착했을 때부터 그들의 가족과 그들이 건설한 마콘도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그 날까지, 가족을 이끈건 우르술라에서부터 마지막에 아마란타 우르술라에 이르기까지 모두다가 여성이었다. 이런 생각이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으로 느끼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만약에 다른 여성이 살아있었다면 적어도 그들의 가계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년동안의 고독』처음에는 너무나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나와 아니 우리 모두와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와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었고, 고독을 잊게 하는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한다.
우르술라 가족들이 느끼는 백년동안의 고독.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고독이 과연 ‘백년’이라는 시간동안 느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이 느끼는 고독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의 고독은 백년보다는 훨씬 적은 기간동안 사람들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우르술라 가족의 이름이 대를 이어서 되풀이되어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들의 되풀이되어지는 고독은 세대를 이어 결국엔 소멸하는 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고독이라는 것은 우리네 삶에 있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우리의 일부가 아닐까?
얼마 전에 본 영화가 있다. 코믹 잔혹물 형식의 『조용한 가족』이라는 영화였는데 거기서 이런 얘기가 있었다. 한 투숙객이 종업원(그 가족의 한 구성원)에게 묻는다, “학생, 고독이 뭔지 알아?”.... 그러니까 학생은 “저,,, 학생 아닌데요?!” 아마도 이런 대사는 관객들을 웃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에 그 투숙객은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고독 때문에 말이다.
이 글 속에서도 우르술라 가족들은 고독을 잊기 위해, 아니 영원히 떨쳐버리기 위해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의 성관계를 맺거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파티를 열거나, 아니면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자신만의 일에 몰두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결코 그들에게 고독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을 쓴 채 자신들의 진실을 감추는 그러한 행동은 그들을 더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빠트릴 뿐이다. 이러한 그들의 삶, 아니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몸부림을 볼 때, 가슴이 너무 답답했으며, ‘꼭 그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독을 안으로만 삭힐 뿐 서로의 마음을 터놓지는 않았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렇듯이 말이다. 진정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는 『어린왕자』에서의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관계어린왕자와 고향별의 장미와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길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도, 몸과 몸을 맞대는 것도 아닌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통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했다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모두에게 잊혀질 가족사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책을 읽으면서 아니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이들의 가족사에는 항상 여성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 가족이 영위해 온 백년동안 그들의 축, 다시 말해서 가족을 이끌어간 중심은 여성이었다. 이런 생각이 든건 아마도 내가 feminism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래서 내겐 부엔디아 가족이 아닌 우르술라 가족이다- 그들이 처음 마콘도에 정착했을 때부터 그들의 가족과 그들이 건설한 마콘도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그 날까지, 가족을 이끈건 우르술라에서부터 마지막에 아마란타 우르술라에 이르기까지 모두다가 여성이었다. 이런 생각이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가 마음으로 느끼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만약에 다른 여성이 살아있었다면 적어도 그들의 가계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년동안의 고독』처음에는 너무나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나와 아니 우리 모두와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와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었고, 고독을 잊게 하는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한다.
추천자료
- [독후감/감상문/서평]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독후감/감상문/서평]콘크리트 주택에서는 9년 일찍 죽는다
- 공부력 서평/독후감/감상문
- 아프니까청춘이다 서평+감상문
- [서평/감상문] 역사란 무엇인가 - 변화하는 역사학 _ 에드워드 카(E.H. Carr) 저
- [독후감/감상문/서평/요약/줄거리] 사랑을 배우다 _ 무무 지음
- 화난 원숭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독후감 감상문 서평 송인혁!!!!
- [독후감/감상문/서평/요약/줄거리] 절대강자 _ 이외수 저 !!!!
- [독후감/감상문/서평/요약/줄거리] 소셜 지용활 - SNS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최상의 방...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