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역사B형] 캄보디아의 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 관련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3건을 선정한 뒤 그 자료를 근거로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작성_캄보디아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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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의역사B형] 캄보디아의 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 관련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3건을 선정한 뒤 그 자료를 근거로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작성_캄보디아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캄보디아의 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 관련 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3건을 선정한 뒤, 그 자료를 근거로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와 관련된 글을 스스로 주제와 목차를 설정하여 400자원고지 15쪽(A4용지 5장) 정도로 작성하시오.



Ⅰ. 서론

Ⅱ. 본론

 1. 노로돔 시하누크는 누구인가?
 2. 캄보디아의 현대사
 3. 캄보디아의 정치
  1) 정치제도- 입헌군주국, 의원내각제
  2)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흐름
  3) 최근의 정치동향
 4. 킬링필드에 대해서
  1) 크메르루주와 폴 포트
  2) 킬링필드
 5. 캄보디아의 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 관련 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3건을 선정
  1) 시아누크가 주는 교훈
  2) 왕자들의 뒤통수를 치다.
  3) 시아누크 前 캄보디아 국왕 사망… 두차례 즉위·망명·내전 파란만장한 삶
 6.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라 평가하고 있으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평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1922년,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과 시소와트 코사마크 왕비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국왕이 사망한 뒤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할 차례였지만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그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렸다. 어린 그를 얕보고 허수아비 국왕으로 세우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젊고 패기에 찬 그는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일본을 등에 업고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하자 돌변해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하며 프랑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이루어낸다. 그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것을 두고 캄보디아 국민은 그를 ‘독립의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하고 있다.
1955년 그는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퇴하고, 총리·외무장관·유엔 상임대표를 지냈으며 5년 뒤인 1960년 4월3일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으며 스스로를 왕 대신 국가원수라고 칭했다. 시아누크는 중립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국내의 좌·우 양파 급진주의자를 통제하고자 노력해 캄보디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다른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격변을 겪은 데 비해 그가 온건정치를 펼친 캄보디아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65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시아누크는 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미국은 캄보디아를 폭격했고 그는 1965년 미국과 단교했다. 이것이 캄보디아 내전의 불씨를 제공했다. 시아누크가 한편으로 캄보디아를 내전으로 몰고 간 장본인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쫓아냈다. 그는 중국과 북한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 생활 중 시아누크가 론 놀 장군을 몰아내기 위해 손을 잡은 세력이 바로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르 루주였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그가 여우를 잡으려고 범을 불러들인 꼴이었다.
시아누크의 아낌없는 지지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가 론 놀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1975년 그는 다시 고국인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가택연금이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아누크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가 시아누크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 정권은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연금 상태에서 그는 3년간 국민 170만여 명이 학살과 기아, 질병으로 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979년 1월 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한 크메르 루주 정부는 유엔에 나가 크메르 루주를 옹호하라며 시아누크를 석방했다. 그러자 그는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고발하고 크메르 루주와도 관계를 끊었다. 그는 둘 다 비판하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주의를 택했다. 크메르 루주가 몰락하고 1993년 5월 유엔이 주관하는 캄보디아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 결과에 따라 구성된 의회는 그해 9월 군주제 복귀를 의결했고 시아누크는 다시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말이 국왕이지 실권은 총리가 갖게 되고 그는 상징적인 군주에 불과했다.
시아누크가 걸어온 길은 중립노선 또는 줄타기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 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 철학은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약소국의 수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립과 줄타기 외교로 캄보디아가 한때 혼란한 국제정세에서 슬기롭게 대처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그의 일관되지 못한 중립노선과 줄타기 외교라는 전략은 결국 내전과 킬링필드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몰고 왔다. 시하누크 자신은 진정 조국을 위해 평생을 몸 받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혼란과 상처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캄보디아의 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 관련 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3건을 선정한 뒤, 그 자료를 근거로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시하누크의 기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시하누크는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립이면서도 가변적인 동맹 노선을 선택하면서 약소국이었던 캄보디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강대국의 이해 관계 속에서 시하누크의 이러한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끝내 이념이라는 거대한 태풍에 휘말려 들었다. 결과론적으로 시하누크는 캄보디아의 평화를 지켜내지 못했고, 인류 역사 상 가장 참혹한 학살이라 할 수 있는 킬링필드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아니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일들이다. 어쩌면 그는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대표적인 피해자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전에 우리는 결과에 우선하여 그가 할 수 있었던 정치적 결정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Ⅳ. 참고문헌
1. 이마가와 에이치 저, 이홍배 역동남아시아 현대사와 세계 열강의 자본주의 팽창 하, 이채, 2011.
2. 최유식, 시아누크가 주는 교훈, 조신일보, 2012.10.22일자.
3. 푸 키아, 왕자들의 뒤통수를 치다, 한겨레, 2004.11.19일자.
4. 남혁상, 시아누크 前 캄보디아 국왕 사망… 두차례 즉위·망명·내전 파란만장한 삶, 국민일보, 2012.10.15일자.
5. 김재명,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지형, 2006.
6. 고훈우, 노로돔 시아누크 - 권력과 리더십 3, 인물과사상사, 2002.
7. 이지상, 혼돈의 캄보디아 불멸의 앙코르와트, 북하우스, 2007.
8. 오귀환, 한권으로 읽는 세계사, 페이퍼로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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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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