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의 신병으로 무력한 기간동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많은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기는 섭정을 수행하면서 샤티용의 레날드가 이집트와 시리아를 오가는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묵인하는 등 보두앵의 뜻에 많이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보두앵은 1183년 기를 섭정에서 해임하고 시빌라의 아들 보두앵을 보두앵 5세로써 공동왕으로 세우고 기와 시빌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까지 시도하였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봄에 죽었다. 시빌라의 아들 어린 보두앵 5세는 단독으로 왕이 되었고 레몽이 섭정으로 에데사의 조슬랭 3세가 보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두앵 5세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1186년 여름 아크레에서 죽었다. 시빌라는 예루살렘 왕국의 후계자로 단독으로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시빌라에 반대하는 귀족가문들이 꽤 있었고 또다른 상속자 이사벨이 있었기 때문에 시빌라는 제위에 오르기 전에 새로운 남편을 구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제위에 오르자 마자 남편을 다시 뤼지냥의 기로 정해버리고 그를 공동왕으로 세웠다.
시빌라는 레몽과 이사벨같은 반대파를 아우르고 자신의 지위를 보존했다. 당시 살라흐 앗 딘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구하려고 애썼는데 기와 레몽의 협력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살리흐 앗 딘의 군대에 패배하고 기는 살라딘의 포로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단숨에 나머지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성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시빌라와 하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벨린의 발리앙은 예루살렘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결국 10월 2일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겨주었다. 시빌라는 트리폴리로 쫓겨났다.
살라흐 앗 딘은 1188년 기를 다마스쿠스에서 풀어주었는데 기와 시빌라는 다시 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유일하게 예루살렘에서 남은 항구도시인 티레로 들어가려하였다. 그러나 당시 티레를 지배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반대로 성밖에서 머물게 되었고 기는 새로 발흥한 제3차 십자군에 호응하여 아크레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거의 2년을 끌었고 1190년 공격군의 진지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시빌라와 그의 어린 두 딸은 죽고 말았다. 시빌라의 사후 왕국의 제위를 놓고 또 다른 아모리의 딸 이사벨과 기가 대립했는데 결국 이사벨이 적법한 후계자가 되었다.
보두앵 4세(Baudouin IV, 1161년 - 1185년 3월 16일)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1174년부터 1185년까지의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다. 그의 친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여왕 시빌라가 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가 시빌라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가 있으며, 어린 남동생도 있었으나 유년기에 일찍 죽었다. 별칭은 ‘문둥이왕 보두앵’(Baudouin le Lepreux)이다.
기 드 뤼지냥 [Gui de Lusignan, 1140~1194]
예루살렘왕 겸 사이프러스왕. 프랑스 프와투의 명문 출신으로, 1180년 예루살렘왕 아모리 1세의 딸 시빌라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1187년 살라딘과 싸워 패전 포로가 되었으나 퇴위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192년 영국왕 리처드 1세와 교섭하여 예루살렘을 키프로스섬과 교환, 키프로스에 왕국을 세웠다.
르노 드 샤티용(1125년 1187년 7월 4일)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로 십자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성지에 남아 1153년부터 1160년까지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렸다. 그는 당시에 이슬람과의 휴전협상을 빈번히 어기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고 결국 살라흐 앗 딘에게 붙잡혀 직접 살라흐 앗 딘의 손으로 처형당했다.
<왜 실화를 그대로 담지 않은 것일까?>
주인공 발리앙 드 이블랭은 대장장이로 설정한 이유는 보다 그 때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잘 표현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다. 발리앙의 죽은 아내가 자살을 했다는 이유로 목이 도끼로 잘려 나가는 것도 그 때의 풍습이었고, 계율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약자에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실제의 발리앙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주가 될 수 없었지만 영화에서는 영주가 될 수 있게 장자로 설정되었고 부패한 성직자인 동생이 영주자리를 위협하는 유일한 걸림돌인데, 형이 죽으면 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형인 발리앙을 부추겨 십자군 전쟁에 내보내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때의 세습 제도를 은밀하게 알려준다.
발리앙과 시빌라의 연애에 대해서는 재미와 극적인 요소, 시빌라의 역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넣었다고 하나,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의 시빌라는 기 드 루지냥을 끔찍이 사랑하여 많은 반대 속에서도 결혼을 했고, 살라딘에게 기드 루지냥이 잡혔을 때도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고, 그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죽자마자 기드 루지냥을 바로 왕위에 올린 것도 그녀의 의지였다. 또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자마자 자신의 지위를 되살리기 위해 트리폴리, 안티오크 등 여러 대도시를 전전하다가 결국에 사망하는 비운의 여왕이지만 그 당시 자기가 원하는 일을 다 하면서 산 여인도 참 드물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무엇보다도 십자군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당초의 목적과 다르게 기독교 성지 수호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영토 확장과 재물을 늘리려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예루살렘이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체험하는 신앙의 원천인지 아니면 신앙을 구실로 자신이 이속을 채우려는 방편에 불과한지를 묻고 있다.
특히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을 관용과 지혜 모두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서구편향적인 시각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으로 끝내지 않고 평화를 위한 협약을 맺은 것 또한 자칫 가지기 쉬운 반이슬람 정서나 반기독교정서로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이유로 무슬림과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묻고 있다.
보두앵 4세는 1185년 봄에 죽었다. 시빌라의 아들 어린 보두앵 5세는 단독으로 왕이 되었고 레몽이 섭정으로 에데사의 조슬랭 3세가 보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두앵 5세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1186년 여름 아크레에서 죽었다. 시빌라는 예루살렘 왕국의 후계자로 단독으로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시빌라에 반대하는 귀족가문들이 꽤 있었고 또다른 상속자 이사벨이 있었기 때문에 시빌라는 제위에 오르기 전에 새로운 남편을 구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제위에 오르자 마자 남편을 다시 뤼지냥의 기로 정해버리고 그를 공동왕으로 세웠다.
시빌라는 레몽과 이사벨같은 반대파를 아우르고 자신의 지위를 보존했다. 당시 살라흐 앗 딘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구하려고 애썼는데 기와 레몽의 협력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살리흐 앗 딘의 군대에 패배하고 기는 살라딘의 포로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단숨에 나머지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성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시빌라와 하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벨린의 발리앙은 예루살렘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결국 10월 2일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넘겨주었다. 시빌라는 트리폴리로 쫓겨났다.
살라흐 앗 딘은 1188년 기를 다마스쿠스에서 풀어주었는데 기와 시빌라는 다시 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유일하게 예루살렘에서 남은 항구도시인 티레로 들어가려하였다. 그러나 당시 티레를 지배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반대로 성밖에서 머물게 되었고 기는 새로 발흥한 제3차 십자군에 호응하여 아크레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거의 2년을 끌었고 1190년 공격군의 진지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시빌라와 그의 어린 두 딸은 죽고 말았다. 시빌라의 사후 왕국의 제위를 놓고 또 다른 아모리의 딸 이사벨과 기가 대립했는데 결국 이사벨이 적법한 후계자가 되었다.
보두앵 4세(Baudouin IV, 1161년 - 1185년 3월 16일)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1174년부터 1185년까지의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다. 그의 친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여왕 시빌라가 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루살렘의 보두앵 5세가 시빌라의 아들이다. 그의 배다른 누이로는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가 있으며, 어린 남동생도 있었으나 유년기에 일찍 죽었다. 별칭은 ‘문둥이왕 보두앵’(Baudouin le Lepreux)이다.
기 드 뤼지냥 [Gui de Lusignan, 1140~1194]
예루살렘왕 겸 사이프러스왕. 프랑스 프와투의 명문 출신으로, 1180년 예루살렘왕 아모리 1세의 딸 시빌라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1187년 살라딘과 싸워 패전 포로가 되었으나 퇴위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192년 영국왕 리처드 1세와 교섭하여 예루살렘을 키프로스섬과 교환, 키프로스에 왕국을 세웠다.
르노 드 샤티용(1125년 1187년 7월 4일)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로 십자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성지에 남아 1153년부터 1160년까지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렸다. 그는 당시에 이슬람과의 휴전협상을 빈번히 어기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했고 결국 살라흐 앗 딘에게 붙잡혀 직접 살라흐 앗 딘의 손으로 처형당했다.
<왜 실화를 그대로 담지 않은 것일까?>
주인공 발리앙 드 이블랭은 대장장이로 설정한 이유는 보다 그 때 당시의 서민들의 삶을 잘 표현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다. 발리앙의 죽은 아내가 자살을 했다는 이유로 목이 도끼로 잘려 나가는 것도 그 때의 풍습이었고, 계율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약자에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실제의 발리앙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주가 될 수 없었지만 영화에서는 영주가 될 수 있게 장자로 설정되었고 부패한 성직자인 동생이 영주자리를 위협하는 유일한 걸림돌인데, 형이 죽으면 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형인 발리앙을 부추겨 십자군 전쟁에 내보내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때의 세습 제도를 은밀하게 알려준다.
발리앙과 시빌라의 연애에 대해서는 재미와 극적인 요소, 시빌라의 역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넣었다고 하나,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의 시빌라는 기 드 루지냥을 끔찍이 사랑하여 많은 반대 속에서도 결혼을 했고, 살라딘에게 기드 루지냥이 잡혔을 때도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고, 그의 아들 보두앵 5세가 죽자마자 기드 루지냥을 바로 왕위에 올린 것도 그녀의 의지였다. 또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자마자 자신의 지위를 되살리기 위해 트리폴리, 안티오크 등 여러 대도시를 전전하다가 결국에 사망하는 비운의 여왕이지만 그 당시 자기가 원하는 일을 다 하면서 산 여인도 참 드물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무엇보다도 십자군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당초의 목적과 다르게 기독교 성지 수호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영토 확장과 재물을 늘리려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예루살렘이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체험하는 신앙의 원천인지 아니면 신앙을 구실로 자신이 이속을 채우려는 방편에 불과한지를 묻고 있다.
특히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을 관용과 지혜 모두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서구편향적인 시각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기고 지배하는 방식으로 끝내지 않고 평화를 위한 협약을 맺은 것 또한 자칫 가지기 쉬운 반이슬람 정서나 반기독교정서로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이유로 무슬림과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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