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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회에는 전통적으로 다신교가 강했다. 로마는 대체로 포용성을 발휘한 나라였고 종교 문제에서도 관용적이었다. 속주의 다양한 신앙을 금지하기보다 묵인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들의 질서와 이념을 부정하지 않는 한 속주민의 신앙을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수용하기도 했다. 주피터(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신들이 큰 마찰 없이 로마에 수용되었고,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동방의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 등도 로마에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지중해 곳곳의 신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그런 로마가 왜 기독교는 때로 모든 수단을 다해 억압하고 박해했을까?
이처럼 로마는 지중해 곳곳의 신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그런 로마가 왜 기독교는 때로 모든 수단을 다해 억압하고 박해했을까?
본문내용
주들이 왕권의 근거로 들게 되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는 콘스탄티누스였던 셈이다.
이후 기독교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드디어 국교가 되었고, 다른 종교는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음으로써 로마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고 노동의 천시를 제거하여 농민 신분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은 라틴어가 유럽에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크리스트교 문화의 전파는 헬레니즘과 더불어 유럽문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그리스 문화와 함께 유럽 문화의 주춧돌을 이룬다
참고자료
정태남 외,『로마 역사의 길을 걷다』(마로니에북스, 2009)
도널드 R.더들리, 김덕수 역『로마문명사』(현대지성사, 1997)
이후 기독교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드디어 국교가 되었고, 다른 종교는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음으로써 로마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고 노동의 천시를 제거하여 농민 신분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은 라틴어가 유럽에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크리스트교 문화의 전파는 헬레니즘과 더불어 유럽문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그리스 문화와 함께 유럽 문화의 주춧돌을 이룬다
참고자료
정태남 외,『로마 역사의 길을 걷다』(마로니에북스, 2009)
도널드 R.더들리, 김덕수 역『로마문명사』(현대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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