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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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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켰다.
-북문학사(北門學士)
무측천은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분 하에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했다.
- 무거(武擧)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거나,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녀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다. 그리고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관리를 발견하면 즉각 그들의 직위를 강등하거나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699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즉 이현李顯)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다. 705년 정월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기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706년 정월에 무측천의 영구는 장안으로 운송되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 지금의 서안시 서북쪽 건현乾縣 양산梁山에 있음)에 합장되었다. 무측천이 죽은 후 그녀의 휘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후손들의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다. 중종이 죽은 후 다시 황위에 오른 무측천의 막내아들 예종 이단은 그녀의 존호를 "천후(天后)"라 하였다가 다시 "대성천후(大聖天后)에서 "천후황제(天后皇帝)", "성후(聖后)"라 하였다.
-북문학사(北門學士)
무측천은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분 하에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했다.
- 무거(武擧)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거나,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녀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다. 그리고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관리를 발견하면 즉각 그들의 직위를 강등하거나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699년 무측천은 유폐시켰던 자신의 셋째 아들 중종 이철(즉 이현李顯)을 다시 불러 황태자로 삼았다. 705년 정월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기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706년 정월에 무측천의 영구는 장안으로 운송되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고종의 무덤인 건릉(乾陵: 지금의 서안시 서북쪽 건현乾縣 양산梁山에 있음)에 합장되었다. 무측천이 죽은 후 그녀의 휘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후손들의 존경심은 바뀌지 않았다. 중종이 죽은 후 다시 황위에 오른 무측천의 막내아들 예종 이단은 그녀의 존호를 "천후(天后)"라 하였다가 다시 "대성천후(大聖天后)에서 "천후황제(天后皇帝)", "성후(聖后)"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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