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마케팅,브랜드,브랜드마케팅,기업,서비스마케팅,글로벌,경영,시장,사례,swot,stp,4p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 문무왕의 유골이 이 돌 밑에 놓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뒤에서 다룰 대왕암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이 있지만, 여하튼 이 방식은 불탑의 사리 봉안 장치와 비슷하다.
불법을 높이 받들겠다는 문무왕의 뜻, 그리고 문무왕의 유골을 안치한 방식이 불탑의 그것과 비슷한 점, 또 대왕암과 감은사와의 깊은 연관성으로 볼 때 대왕암은 불교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발견 과정 및 관련 논쟁
문무왕릉은『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다가 1965년에야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가 경주 부윤으로 부임한 후 이곳을 찾아 느낀 감회,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 문무왕의 화장 사실 등을 적은 글이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 적혀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왕암은 실제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이 수중릉 대왕암으로 언론에 발표되기 전부터 이미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대왕암이라 부르면서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였으며, 섬에 오르는 것을 금기시하였다고 한다.
1965년의 발견은 전 동국대 총장인 황수영 박사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의 스승이었던 미술 사학자 고유섭의 영향이 크다. 고유섭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사학자로 일제 강점기 개성 박물관장을 지냈는데 ,이곳이 문무왕의 수중릉이며 신라의 성지임을 늘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 그의 제자인 황수영 박사가 1965년 대왕암에서 상륙하여 처음으로 조사를 했고 이곳이 문무왕릉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언론 발표 후 대왕암을 둘러싸고 학술적으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논란의 핵심은 유골함을 묻고 장사를 지낸 수중릉인지 아니면 단순히 화장한 유골을 뿌린 것인지 하는 점이다. 2001년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와 KBS 역사스페셜팀이 대왕암 바위 안쪽에 대해 수중 탐사를 실시하였는데, 탐사 결과 바위의 위쪽에서는 인위적으로 돌을 가공한 흔적이 나타났지만 바위 아래쪽은 지하 암반이 수직으로 갈라져 있어 유골을 묻기 어려운 상태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이 곳을 수중릉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동해바다에 장사 지냈다.”라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왕암 가운데 인공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으며, 못의 가운데 있는 돌이 유골을 덮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다. 또한 문무왕 후대의 왕들도 화장한 후에는 왕릉을 만들어 유골을 안치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신성한 왕의 유골을 그냥 바다에 뿌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능지탑에서 화장하여 이곳에 유골을 뿌렸으리라는 주장은 앞서 언급했던 조선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가 1796년에 발견하였다는 문무왕릉비 비문을 근거로 한다. 그 비문에 “뼈를 부숴 바다에 뿌렸다.”라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어떻게 끝이 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천 년이 훨씬 넘은 시점에서 정확하게 밝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며 그냥 논쟁으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동해구(東海口) 삼대유적이라 불리는 감은사, 이견대, 대왕암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했지만, 동해를 통해서 끊임없이 침입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던 왜를 막기 위해 대종천 입구에 절을 창건하려 하였다. 그가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절을 완공하였는데, 그 절이 바로 감은사이다. 이후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구를 막고 나라의 평화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유골은 감은사에서 멀지 않은 동해바다 대왕암에 뿌려졌다. 이 같은 문무왕의 호국 정신과 관련된 전설은 계속 이어졌으며, 정말로 용이 된 문무왕이 쳐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 곳이 바로 이견대이다. 이견대에서 용이 된 문무왕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전해주며, 끝까지 나라의 평안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문무왕은 백성을 위해서 노력했고, 나라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몸소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왕이었다.
만파식적, 진평왕의 천사옥대, 그리고 황룡사 9층탑은 신라의 삼보라 불리며 신라를 외침과 재해로부터 보호했지만 지금은 그 모두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파식적을 낳은 대왕암은 오늘도 새파란 파도에 일렁이면서 동해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한 이를 가져다준 용이 된 문무왕의 정신은 이견대와 감은사지에서 느낄 수 있다. 세 곳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이러한 문무왕의 정신을 느껴봄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와 관련하여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Ⅵ. 참고문헌
고석배(2007), 「감은사지삼층석탑(서탑)에 사용된 석재의 공급지에 대한 연구」,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고운기(2011),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현암사, p.234~253 / p.288~290
김상태(2007), 「감은사의 사리장엄에 의한 2탑구성원리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Vol.16 No.2
김승호(1999), 『절따라 전설따라』, 대원정사, p. 218~224
김남용(2005), 『(국보와 보물이 있는) 옛 절터 이야기』, 일진사
김도경(2011), 『사찰의 앞마당과 뒷마당』, (재)대한불교진흥원
김영옥(2002), 「감은사 건축에 관한 연구」, 경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우리사찰답사회(2005), 『경상도로 떠나는 사찰기행』, 문예마당, p. 250~255
신대현(2010), 『우리 절을 찾아서 - 역사 속의 우리 사찰 이야기』,혜안, p.56~75
이광표(2006), 『손안의 박물관』, 효형출판, p. 186~189
이성미(2004), 『내가 본 세계의 건축』, 대원서
이재호(2009),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한겨레출판
천자목(2010), 『천년 고도 경주를 걷다... 서라벌 역사기행』, 두르가, p. 228~239
한정호(2010),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보장형사리기 복원재고」,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한정호(2010), 「감은사지 쌍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비교 고찰」, 석당논총 Vol.48 No.2
경주문화관광 http://guide.gyeongju.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추천자료

  • 가격3,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6.26
  • 저작시기201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037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