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 원불교, 창건사, 회보, 송정산, 불법연구]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립,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건사, 불법연구회(원불교)의 회보, 불법연구회(원불교)와 1930년대, 불법연구회(원불교)와 송정산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불법연구회, 원불교, 창건사, 회보, 송정산, 불법연구]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립,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건사, 불법연구회(원불교)의 회보, 불법연구회(원불교)와 1930년대, 불법연구회(원불교)와 송정산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립

Ⅲ.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창건사

Ⅳ. 불법연구회(원불교)의 회보
1. 당시 출판법
2. 창간 경위와 체제
3. 체제 및 내용

Ⅴ. 불법연구회(원불교)와 1930년대
1. 자력 근면하는 불법연구회와 시대상황
2. 불교혁신운동과 전통불교정책

Ⅵ. 불법연구회(원불교)와 송정산

참고문헌

본문내용

러한 인식의 기초에는 그의 스승인 소태산 박중빈(현 원불교 개창자)의 금강산 법문에 들어나는 “금강산 이 현세계하니 조선이 갱조선이다”는 문맥과 상통한다.
이 문건은 일제하에 금강산을 둘려본 박중빈이 암울하던 당시 한국의 미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암시한 문건이다. 다시 설명을 보충하면, ‘금강산이 전세계에 들어나니 조선은 새로운 조선이 될 것이다’는 요지이다. 이 기행문건은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빗대어 조선의 미래가 양양할 것임을 암유한 내용으로 엮어졌다. 따라서 송정산의 이같은 낙관적 한국관은 실상 그의 스승인 박중빈의 가르침에 의지한, 이른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진 의식의 공유 즉 이심전심의 산물로 보인다. 후일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의 회고에 따르면, 송정산을 자기 문하에 거느린 후 한 번도 마음의 불편을 느낀적이 없다고 술회하였다.
“나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었나니라”(대종경,신성품 18).이에 대해 송정정산은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나는 평생에 기쁜 일 두 가지가 있노니, 첫째는 이 나라에 태어남이요, 둘째는 대종사(소태산 박중빈의 호칭=필자 주)를 만남이니라(법어, 기연편 8). 두 사람의 이와 같은 후일담은 두 사람사이의 신뢰도를 짐작하게 하는 언술이다.
어쨌든, 송정산은 앞서의 언설에서 볼수 있듯, 일제하 한국의 운명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므로서 그의 스승인 소태산 박중빈이 취한 한국의 미래관을 그대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송정산의 비유법은 한국의 전통종교 지도자들이 즐겨쓰던 사회변화의 틀, 즉, ‘先後天의 교역‘이라는 표현을 원용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선후천의 교역, 즉 앞서 지나간 사회가 미래 사회로 바뀌는 시점을 ’지금(현재)‘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변화의 시기, 즉 과도기에 취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군국주의의 전제주의와 합리주의 민주주의…’라고 하였다(박정훈 편저,p.84). 선천시대의 정치는 군국주의/전체주의 정치제도이며 후천시대는 합리주의/민주주의 제도라는 뜻이다. 따라서 2차 대전 시기 일본의 정치체제가 군국주의였음을 감안하면, 그가 보는 선후천의 교역 깃점은 2차대전 종식인 듯하다. 그리고 선천→ 후천으로의 변화는 군국주의/전체주의 → 합의주의/민주주의의 순서로 변화한다.
사회변화란 일정한 경로나 과정을 거쳐 선/후천이 바뀌게 된다. 이처럼 송정산의 의식의 진화를 재구조화하여 보면 일제로부터 조선의 해방을 도처에서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구사한 레토릭이 암시/암유로 일관한 것은 언설을 아껴야하는 일제라는 한계상황에 기인했을 것이다.
그의 스승 박중빈은 이미 1920년대 말기부터 일본이 극복해야할 대상임을 ‘강자로 약자되는 법문’(월말통신 1호)을 통해 시사한 바 있다. 이 문건의 내용은 한국=약자, 일제=강자로 대위 시켜 군림하는 강자가 영원히 강자이려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리고 약자가 그 처지를 극복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간단 명료하고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이 문건속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일제의 압제하에서 약자가 자기 앞길을 개척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주지시킨 점이다. 힘을 길러야 강자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일제하에서는, 조심했어야할 언급이다. 이렇게 본다면, 송정산은, 그의 스승의 가르침이 그러하듯, 결과적으로 일제의 압제하에 처한 당시 한국인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기대하면서 힘의 비축을 은연중에 시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송정산의 이같은 시대변화에 관한 인식틀은 건국론 발표와 해방 2년 전인 1943년 12월 1일 미영중 3국이 모여 합의한 다음과 같은 카이로 선언과 다르지 않다.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과정’(in due course)를 밟아 한국은 자유와 독립의 국가가 될 것을 결의한다(박문옥, p.10 재인).
이 카이로 선언에 들어난 ‘적당한 과정’이란 말을 한국의 당시 정황, 즉 송정산의 선후천 교역 논리에 대입 시키면, 한국민의 노예상태=일제의 군국주의/전체주의-->‘적당한 경로’--> 자유와 독립=합리주의/민주주의로 이행한다. 따라서 송정산은 일제의 종말을, 그리고 다른 대체세력의 등장을, 설사 연합국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세력의 등장을 예견 하였다.
이런 정세 변화의 추이에 대해 송정산은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데 그것은 꼴 머슴이다. 후에는 큰 머슴이 들어온다. 큰 머슴이 들어와야 우리나라가 좋아진다”고 말했다(박정훈,p.89). 그의 말을 다시 정리하면, 꼴 머슴은 일제이며 큰 머슴은 일제보다는 큰 세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 세력의 교체가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시간 경과에 따라 한국을 돕는 주체는 꼴 머슴으로부터 큰 머슴으로, 즉 또다른 힘센 외세로 그 역할이 대체된다는 암시이다 그럼으로 “한국 사람이 된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후일에는 한국사람이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설파 하였다(박정훈,p.87).새로운 ‘큰머슴’을 맞더라도 그것은 머슴이 뿐 주인일 수 없다는 일종의 한민족 우월감의 또 다른 암시라 할 것이다.
‘큰 머슴’이라는 이름의 거대 외세가 ‘꼴머슴’인 일제를 대신하여 대체세력으로 들어와야 한국이 좋아진다는 그의 논리는 외세 대망론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해방정국하의 미-소의 남북간 분할 군정통치 상황과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다.
참고문헌
김찬기, 원불교성가 형성사의 연구, 원광대학교, 2010
박영학, (일제하 익산의)불법연구회와 언론,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6
박영학, 불법연구회 잡지의 법설 기록자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06
박영학, 연구논문 : 해방 후 불법연구회의 팜프렛에 관한 연구 - 송정산의 건국론을 중심으로 -, 한국원불교학회, 1998
박상권, 정산사상의 현대적 조명: 제1편 근대사상과 정산종사 불법연구회창건사를 통해 본 신순철, 일본의 식민지 종교정책과 불법연구회의 대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994정산의 역사의식,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998
  • 가격6,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7.18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202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