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의사
Ⅱ.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열사)
Ⅲ.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Ⅳ.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Ⅴ. 독립운동가 우성 박용만
1. 의형에게 버림받고 동지에게 죽임당한 무장투쟁론자
2. 계몽운동으로 내디딘 고난찬 독립운동의 첫 발
3.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를 창설하여 무장투쟁의 기치를 올리다
4. 무형국가(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창한 민족주의자
5. ‘단산’섬의 대조선 국민군단장
6. 미대륙의 풍운아, 만주대륙에서 동포의 손에 쓰러지다
Ⅵ.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Ⅶ.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
참고문헌
Ⅱ.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열사)
Ⅲ.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Ⅳ.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Ⅴ. 독립운동가 우성 박용만
1. 의형에게 버림받고 동지에게 죽임당한 무장투쟁론자
2. 계몽운동으로 내디딘 고난찬 독립운동의 첫 발
3.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를 창설하여 무장투쟁의 기치를 올리다
4. 무형국가(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창한 민족주의자
5. ‘단산’섬의 대조선 국민군단장
6. 미대륙의 풍운아, 만주대륙에서 동포의 손에 쓰러지다
Ⅵ.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Ⅶ.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
참고문헌
본문내용
독립군은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하여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극동 공화국의 정부의 무장해제 요구뿐이었고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사정이 이처럼 절박해지자 김좌진과 이범석은 다시 빈 몸으로 만주에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만주 지방에서의 독립군에 대한 감시는 점차로 삼엄해졌고, 이제는 무장 투쟁은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 되었다. 그동안에 상하이 임시 정부로부터는 김좌진에게 군무 총장의 직책과 국무 위원의 직책을 내린다는 통고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오로지 교포의 단합과 그 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교민 사업에 열중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마흔 두살을 맞은 그는 집 앞 정미소의 발동기이 고장을 수리하다가 옛날 부하였던 사람의 권총 저격을 받고 쓰러지고 만다.
한편으로 이범석은 1920년에 김좌진과 접촉이 끊어진 채로 사냥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때로는 중국 대군벌 밑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 뒤로 중국군의 고급 장교를 거친 그는 1940년에 임시 정부 중앙군으로서 광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참모장에 취임함으로서 오랜 방랑의 막을 내렸다. 독립 뒤에 이범석은 조선 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였고 정부수립 뒤에는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의 자리를 함께 맡기도 하였다.
Ⅶ.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
이극로는 1897년 경상남도 의령군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어릴적부터 주경야독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정독하며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족운동가들의 국구 및 민중 계몽논설이 매일 실렸고 이것을 읽은 이극로는 한말 국가 존망의 위기에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해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향을 떠나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2년 고국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국권을 강탈당한 망국민으로 국권회복과 투쟁노선을 정립하기위한 새로운 모색의 일환이었고 민족적 양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는 서간도로 망명하면서 값진경험을 하는데 평북에 이르러 한지역과 지역간의 언어차이로 인한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조선어 연구와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한글연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적 일체감의 형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서간도로 망명후 이극로는 1912-1915년가지 백산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신채호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상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여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원하면서 1916년 동제대학에 입학한다. 1916-1921년까지 동제대학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나 임정의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극로는 1921년 6월 모스크바에 도착해 극동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계급적 토대에 인한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1927년 벨기에의 부르셀에서 약소민족대회에 참가하여 “1)마관조약실행으로 조선독립확보 2)조선총독정치 철폐 3)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주장하며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잊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의 기회로도 이용하였다.
1927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취득 후 파리대학에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며 언어학과 음성학 분야에서 한글연구역량을 축적하고 미국, 일본등지를 거쳐 1929년 귀국 후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행동철학을 가지고 한글연구에 남다른 관심과 정열로 한글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며 학술연구단체 차원을 뛰어 넘어 한글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혁명의 토대마련이라는 어문 민족운동단체로의 성격이 강화되어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조직,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1932년 [한글]이라는 조선어학회기관지 발행등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만주에서 재만동포 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신간회를 비롯한 11개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이극로를 대표로 조사·위문단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그는 어문 민족운동뿐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였다.
이극로가 중심이 된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제정 발표, 1936년 서울말 기준인 ‘조선어표준말모음’을 완성하고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결정 발표함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준비작업을 진행해 갔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조선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키 위한 공작을 벌여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는 반면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을 중단시키고 강제 해산시켰다. 그 사건으로 6년 복역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출옥하였다.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자주적 통일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며 신탁통치 찬·반의 문제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이들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하여 1946년 건민회를 조직하여 민족 연성과 민중 계몽운동에 온 힘을 다했다. 그의 그러한 노력으로 건민회 대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는 북한에 잔류하였다. 양심적 민족주의 세력인 임정의 주류조차 단독선거 불참이 결정된 상황에서 새로 건설될 남한 단정의 성격은 자주성, 민족성, 민중성마저 훼손된 정부일 것이라는 명확관화한 사실에 절망하여 북한에서 후일을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북한에서활동도 1964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의장에 선임되어 주로 통일 관련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2010), 독립군 지도자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 현대사회연구소
- 김창수(2002), 한인애국단과 이봉창의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박영실(2003), 이범석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달우(2010), 유관순 열사 애국정신의 기저와 교육적 의의, 한국교육철학회
- 이준식(2010), 도산 안창호와 사회주의, 도산학회
- 조규태(2005),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편으로 이범석은 1920년에 김좌진과 접촉이 끊어진 채로 사냥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때로는 중국 대군벌 밑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 뒤로 중국군의 고급 장교를 거친 그는 1940년에 임시 정부 중앙군으로서 광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참모장에 취임함으로서 오랜 방랑의 막을 내렸다. 독립 뒤에 이범석은 조선 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였고 정부수립 뒤에는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의 자리를 함께 맡기도 하였다.
Ⅶ.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
이극로는 1897년 경상남도 의령군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어릴적부터 주경야독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정독하며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족운동가들의 국구 및 민중 계몽논설이 매일 실렸고 이것을 읽은 이극로는 한말 국가 존망의 위기에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해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향을 떠나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2년 고국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국권을 강탈당한 망국민으로 국권회복과 투쟁노선을 정립하기위한 새로운 모색의 일환이었고 민족적 양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는 서간도로 망명하면서 값진경험을 하는데 평북에 이르러 한지역과 지역간의 언어차이로 인한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조선어 연구와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한글연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적 일체감의 형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서간도로 망명후 이극로는 1912-1915년가지 백산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신채호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고 상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여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원하면서 1916년 동제대학에 입학한다. 1916-1921년까지 동제대학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나 임정의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극로는 1921년 6월 모스크바에 도착해 극동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계급적 토대에 인한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1927년 벨기에의 부르셀에서 약소민족대회에 참가하여 “1)마관조약실행으로 조선독립확보 2)조선총독정치 철폐 3)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주장하며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잊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의 기회로도 이용하였다.
1927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취득 후 파리대학에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며 언어학과 음성학 분야에서 한글연구역량을 축적하고 미국, 일본등지를 거쳐 1929년 귀국 후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행동철학을 가지고 한글연구에 남다른 관심과 정열로 한글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며 학술연구단체 차원을 뛰어 넘어 한글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혁명의 토대마련이라는 어문 민족운동단체로의 성격이 강화되어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조직,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1932년 [한글]이라는 조선어학회기관지 발행등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만주에서 재만동포 학살사건이 발생하여 신간회를 비롯한 11개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이극로를 대표로 조사·위문단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그는 어문 민족운동뿐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였다.
이극로가 중심이 된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제정 발표, 1936년 서울말 기준인 ‘조선어표준말모음’을 완성하고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결정 발표함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준비작업을 진행해 갔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조선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키 위한 공작을 벌여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는 반면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을 중단시키고 강제 해산시켰다. 그 사건으로 6년 복역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출옥하였다.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자주적 통일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며 신탁통치 찬·반의 문제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이들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하여 1946년 건민회를 조직하여 민족 연성과 민중 계몽운동에 온 힘을 다했다. 그의 그러한 노력으로 건민회 대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는 북한에 잔류하였다. 양심적 민족주의 세력인 임정의 주류조차 단독선거 불참이 결정된 상황에서 새로 건설될 남한 단정의 성격은 자주성, 민족성, 민중성마저 훼손된 정부일 것이라는 명확관화한 사실에 절망하여 북한에서 후일을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북한에서활동도 1964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의장에 선임되어 주로 통일 관련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2010), 독립군 지도자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 현대사회연구소
- 김창수(2002), 한인애국단과 이봉창의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박영실(2003), 이범석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달우(2010), 유관순 열사 애국정신의 기저와 교육적 의의, 한국교육철학회
- 이준식(2010), 도산 안창호와 사회주의, 도산학회
- 조규태(2005),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