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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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본론
*인상주의 이전의 회화
Ⅰ. 프랑스 회화의 시작과 발흥 - 프랑스 고전회화와 로코코 미술, 왕립 미술 아카데미와 살롱전
Ⅱ. 근대미술의 태동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이후의 회화
Ⅰ. 야수파
Ⅱ. 입체주의
Ⅲ. 에꼴 드 파리
Ⅳ. 초현실주의
Ⅴ. 추상화
*인상주의 - 20세기 미술의 태동
1. 인상주의의 탄생
2. 인상주의
 ① 클로드 모네
 ② 르느와르
 ③ 에드가 드가
3. 후기 인상주의
 ① 신인상주의 - 쇠라
 ② 폴 세잔
 ③ 빈센트 반 고흐
 ④ 폴 고갱
    
맺는 말

본문내용

다.
그는 새로운 원근법을 사용하였으며, 인물과 정물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의 인물화에는 시선이 없다고 비난했다. 인물이 정물과 혼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전반의 작품인 ‘커피포트를 든 여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데생보다 색깔과 톤의 대조를 강조하였다. “자연을 원통, 구, 원추로 보겠다”는 세잔의 생각이 그림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볼륨의 기하학적 처리는 테이블에 적용된 원근법과 함께 큐비즘을 예고해주는 것이다.
1904년 가을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같은 작품은 마티스나 피카소와 같은 당대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세잔은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의 추구는 야수파와 입체파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③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고흐는 네덜란드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밀레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뒤늦게 화단에 뛰어들었으나 10년 밖에 그리지 못하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만다. 그는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아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리며 회화 수업을 쌓았다. 1986년 동생 테오의 소개로 파리에 와 인상주의를 배우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의 그림은 밝아지기 시작한다.
1988년 2월 그는 프로방스의 아를로 가 ‘해바라기’ ‘우체부 룰렝’등 많은 걸작을 그리게 된다. 고흐는 고갱의 그림에 매혹되어 그를 끈질기게 초청하여 오게 한다. 고갱은 그 해 10월 아를에 왔고 고갱과 함께 살았던 2개월 반 동안 고흐가 그린 그림들에는 윤곽선이 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를의 댄스 홀’은 고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그림이고, 인상주의를 떠난 고흐의 기법이 추상화 수준에 이르는 실험적인 것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 달랐던 두 사람은 1889년 1월 불화에 휩싸이고 고흐는 정신병을 일으켜 귀를 자르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한다. 고흐는 생레미의 셍뽈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이 때 그려진 한 초상화는 ‘인간의 무서운 정염을 표현하는 거친 대조나 격렬한 색채’를 통해 그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 고흐의 침실’은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이 그림의 닫혀진 창문이 외부와의 단절과 공포를 상징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녹색은 기쁨과는 거리가 먼 색깔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구도를 단순화시키고, 명암을 제거하여 일본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칠하겠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후에 마티스의 ‘거대한 내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반 고흐의 터질 듯한 빛과 색채의 강렬함은 아를의 밀밭을 그린 ‘라 크로의 수확’에도 잘 나타난다.
1890년 5월 파리에 잠시 머문 고흐는 우와즈 계곡의 오베르에 가 정착하는데 그는 여기서 의사 가셰 박사와 가깝게 지내다가 1890년 7월 27일 자살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고흐는 고갱이나 세잔처럼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고흐는 후에 야수파는 물론 표현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④ 폴 고갱(1848-1903)
고갱은 주식 중매인이었으나 1874년 35세에 피사로를 만나 그림을 시작하는데 1886년까지는 인상주의화풍의 그림을 그린다.
고갱은 반 고흐의 끈질긴 초대로 1888년 가을 아를에 간다. ‘레 알레스깡 공동묘지, 아를’은 고갱이 아를에 갔을 때 그곳의 유명한 기독교 공동묘지를 그린 그림이다. 고갱은 지형상의 사실성은 무시한 채 인상주의의 전통인 강렬한 빛과 분할주의 터치를 사용하고 잇다. 오른쪽의 붉고 강렬한 터치와 푸른 나무 기둥은 나비파에서 야수파를 거쳐 추상화에 이르는 현대 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고갱은 고흐와 결별한 후 영국에서 그린 ‘노란 건초 더미’에서는 거대한 건초더미가 화폭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것을 모네가 그린 건초더미와 비교해본다면 고갱이 인상주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고갱이 스스로 정의한 종합주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큼직한 윤곽선 안의 원색 단일 화면을 통하여 양감 없는 평면적 구성을 시도한다.
고갱은 1891년 타히티 섬으로 도피하여 1895년부터는 이곳에 완전히 정착한다. 이것은 예술의 몰이해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며, 사실주의와 문명의 타락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식사’ ‘타이티의 여인들 또는 해변에서’‘ 신의 날’ ‘ 망고를 든 타히티의 두 여인’ 등등 고갱의 작품에는 타히티 원주민의 이국적 정취와 고갱만의 특유한 화풍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백마’등도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고갱은 재정난과 삶에 대한 회의로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결구 이 섬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고갱은 원시 예술과 일본 판화에 심취하였는데 그는 원근법을 거부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하여 보이는 표면을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색채의 주관성은 야수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표현주의와 입체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프랑스는 회화사를 이끌어온바 다름없을 정도로 회화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특히 인상주의는 그 당시로서도 매우 혁명적인 사조였으나 인상주의가 더 중요한 이유는 이후의 많은 사조들의 모태로서의 의미가 크다는 사실이다. 인상주의가 생겨난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20세기 현대 미술은 인상주의의 토대가 없었다면, 발전이 없이 이전 화풍만 답습했을지 모른다.
프랑스 회화의 역사를 살펴보니 역시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다. 이것이 단순히 프랑스의 지리적 위치라던가 환경적인 요소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예술에 대한 포용성과 그네들의 예술을 사랑하는 국민의 의식적 토대가 지금의 문화 강대국 프랑스가 있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 자료
프랑스 문화와 예술 Blancpain, Marc 새길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정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
프랑스와 프랑스인 최호열 어문학사
그 외 인터넷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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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9.23
  • 저작시기2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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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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